[사회] 복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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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Ⅰ청계천 복원과 의미

Ⅱ생존권과 환경권

Ⅲ청계천복원의 환경법적인 의미

Ⅳ사견

청계천복원사업의 평가 및 환경법적인 고려

Ⅰ청계천 복원과 의미

Ⅱ생존권과 환경권

Ⅲ청계천복원의 환경법적인 의미

Ⅳ사견

참고자료
본문내용
1.청계천의 복원

2003년 7월1일 기공식과 함께 청계천의 복원이 시작되었다. 친환경적인 도시를재건한다는 목표아래 약 2년의 공사의 막이올랐다. 새만금과 같은 결과가 나올것이라는 반대의 의견도 높았고, 서울시민을 위해 꼭 필요한 공사라는 찬성의 의견도 높았다. 그러나, 공사는 이미시작되었고, 이제 문제는 어떡해 청계천을 정말 살아있는 하천으로 만들것인지와 청계천 주변상권의 보호와 주변사람들의 생계에대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 옳고 그름을 논하기보다 이제 그 성공적인 결말을 위하여 모두가 노력하여야 할 때라 생각한다. 여기서는 청계천 복원사업을 평가하고 그 환경법적인 문제들을 논하고자 한다.

2.청계천의 역사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으로 서울의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과 북악의 남쪽 기슭, 남산의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도성 안 중앙에서 만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연장 10.92km의 도시 하천이다.
청계천 유역은 총 면적 50.96㎢로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1394년 서울이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후 도성 안을 지리적으로 구분했을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선으로 작용했다.
도성 내에 있었던 청계천은 주민 생활에 위해 요인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컸는데, 무엇보다 하천의 범람이 문제였다.
1407년 서울의 하천이 범람, 근본적인 조치를 위해 1411년 11월 개거도감(후에 개천도감으로 이름이 바뀜)을 설치하고 52,800명의 인원을 동원한 대규모 개천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때의 공사는 일부 구간의 하상을 파내고 하폭을 넓히는 한편 돌과 나무로 제방을 쌓는 것이었다. 개천 역사가 종결된 후 개천도감은 그대로 행랑조성도감이 되었다.
이후 세종 때에는 도성의 개수와 방수, 방화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수성금화도감이 설치되었고 성종 때에는 개천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수해에 대비했다.
한편 개천은 최적의 자연적인 하수도이기도 했다. 조선초기 그 용도를 둘러싼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종대에 개천의 용도는 하수도로 낙착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인구의 증가와 자연재해 빈발이라는 상황에서 개천이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되는 근본적인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서울의 인구는 점차 증가하여 하수량 자체가 늘어났고 백악과 남산 일대의 수목이 땔감용으로 남벌되고 일부가 경지로 개간됨으로써 토사의 유입량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영조 때에는 준천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영조는 1760년 2월 20만 인원을 동원한 57일간의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준천사업은 하천을 준설하는 동시에 수로를 직선으로 변경하고 양안에 석축을 쌓는 행태로 진행되었다. 이후 준천은 정부의 재정 곤란 속에서도 2~3년마다 한번씩 정례적으로 실시되어 1908년까지 지속되었다.
1908년 대한제국 정부에 의한 마지막 준설이 시행된 후 1918년까지 10여 년간 준천은 한번도 시행되지 않았다. 일제가 청계천을 악의적으로 방치했다가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지배의 중추를 과거 조선과 대한제국의 중심부로 이전할 준비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면서부터였다.
1918년 25만 여 원의 경비를 들여 비로서 준천에 착수한 것은 '경성'의 하수문제를 해결한다는 기능적 의미 외에 조선 지배의 중추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 둔다는 의미도 갖는 것이었다. 이후 청계천 준설공사는 수시로 시행되었다.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고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이 실시되면서 조선의 농촌 과잉인구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었고 농촌을 떠난 농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청계천 제방에도 무허가 임시 건물이 빼곡이 들어찼다. 그리하여 천변은 서울의 대표적 인구 밀집지역으로 부상했다.
천변에서 특히 심각했던 것을 위생문제였다. 장마가 지면 침수되는 가옥이 부지기수였고 전염병이 돌면 바로 전 시가를 휩쓸었다. 집중호우라도 내리면 청계천 하수가 주거 밀집지역으로 바로 역류하였다. 서울 주민의 사망률은 청계천에 가까운 곳에 거주할 수록 높았다.
도심 한복판을 흐르면서 경관면이나 위생면에서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개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가장 간편한 방법은 '복개'였다. 개천을 복개하려는 최초의 계획이 수립된 것은 대한제국기의 일이었다. 1895년 내부령 제9호로 종로 가가의 철거와 도로확장계획이 발표되었고 곧 종로에 전차부설공사가 시작되었다.
1909년에 황토형 절개공사로 얻어진 토사를 이용하여 황토현 구간 일부를 메운 일이 있었지만 이것이 청계천의 본격적인 복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청계천을 복개하여 그 터를 이용하려는 계획은 1926년에도 수립되었다. 대광교에서 주교정까지를 철근 콘크리트로 덮어서 1만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이 곳에 택지와 상가 위락시설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청계천을 복개할 경우 홍수시에 배수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기각되었다.
청계천 처리 문제가 본격적으로 고려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이후 일제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설정하고 경성을 그 중심에 놓으면서부터였다. 이른바 '대경성 계획'이라는 것이었는데 1934년의 시가지 계획령을 계기로 서울의 전반적 개조에 대한 구상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청계천의 전면 복개 구상은 1935년 최초로 발표되었다. 당시 경성부의 마치다 토목과장은 청계천을 전면 복개하여 도로로 만들고 그 위로 고가철도를 놓는 구상을 발표했다. 대경성 계획으로 영등포를 비롯한 1군8면이 새로 경성에 편입될 경우 당시의 시설만으로는 늘어나는 교통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민간의 교통수단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된 것은 군부의 교통수요였다. 용산, 영등포 공업지대에서 생산되는 군수물자를 만주로 신속히 이송하기 위해서는 경성-의주간, 또는 경성-원산 간 도로와 철도의 보완이 필요했고 토지수용비가 필요없는 청계천을 새로운 도로, 철도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재정 문제를 내세운 조선 철도국의 거부로 좌절되었다.
1936년에는 광교와 삼각정 사이를 우선 복개한다는 안이 마련되어 1937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광화문 우체국-삼각정 간을 복개하고자 하였다. 이와 동시에 1939년에는 복개 후 청계천을 자동차 전용도로로 만들려는 안이 마련되었다. 또 1942년부터는 삼각정 동쪽 지역의 청계천을 개수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청계천의 전면 복개안은 1940년 일제가 확정해 놓은 것이었지만 전쟁에 쫓기던 일본이 이를 완수하기란 불가능했다. 일제가 지배하던 기간 중에 복개된 구간은 광화문사거리에서 광통교까지의 구간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는 정치적 혼란기로 건설 전반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따라서 서울시 하수로는 거의 방임 상태였으며 하수로 유지사업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의 재정 상태였다. 이어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역사상 유래 없는 참화를 당하였고, 12,400m의 하수로 시설도 피해를 보았다.
청계천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전후하여 근 10년간을 방임상태로 두어 토사의 매몰이 극심하였다. 이에 1949년에 광교에서 영미교까지 연장 13Km를 3개 공구로 분할하여 9월 30일 동시에 하도 개수공사를 착수하였으며, 1950년 3월중에 준설을 완료하여 계획하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해에 한국전쟁의 발발로 모든 건설사업이 중단되었으며, 1950년 170만 명이었던 서울시 인구가 1951년에는 불과 60여만 명에 이르러 계획적인 하천 개수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53년 환도한 이후 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현실적으로 하천정비와 복개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4년에는 5,256만 환을 투입하여 청계천을 포함한 하수도 개수를 추진하였고, 1955년에는 광교 상류의 135.8m의 청계천 암거공사를 실시하여 일제강점기에 종로구 계동에서 광교 사이의 일부를 복개한 후 첫 번째 복개공사를 실시하였다.
이후 청계천에 대한 본격적인 복개공사는 1958년 5월 25일에 착공하여 1961년 12월에 완공하였다.
당시의 청계천 복개공사는 광교에서 동대문 오간수다리(평화상가측)까지 시내 한복판을 가로 흐르는 길이 2,358.5m, 폭 16~54m의 청계천을 철근 콘크리트로 복개하였다. 이 방대한 공사는 완성되기까지 총 16억 6,170만 환의 공사비가 소요되고 연 24만 2천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그 후 1965년부터 1966년까지 동대문의 오간수다리에서 제2청계교까지의 구간이 복개되었고, 오늘날 마장철교까지의 복개구간은 1978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마장철교 부근의 복개지에 조성된 주차장 견인소에서부터 중랑천과 합류되는 지점까지는 복개되지 않은 채 흘러가고 있다. 복개된 청계천의 위생상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청계천 양안에 차집관거 공사를 1984년에 착공하였으며, 1992년에는 하수도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하수도 재정비사업이 실시된 바 있다.
청계천에 대한 복구공사가 완료된 이후 복개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상가가 밀집하고, 교통량이 폭주하면서 도심에서 외곽으로 진행하는 새로운 도로의 신설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도로 위에 새로이 고가도로가 만들어졌다. 서울시내에서 고가도로가 제일 먼저 가설된 것은 1968년에 준공된 아현 고가도로이다. 서울시에서는 아현 고가도로 건설의 경험을 살려 청계고가도로 공사를 동시에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 8월 15일 공사에 착공하여 1971년 8월 15일 완성되었다. 총 연장 5,650m에 도로 폭이 16m에 이른다.

3.청계천의 주변현황

현재의 청계천로는 약5.4㎞에 이르며 그 위로 폭16m, 연장5,864m에 왕복4차로 자동차전용도로인 청계고가도로가 세워져있다. 그 밑으로 6.27km의 세종로에서 광교를 잇는 지하하수도가 흐르고 있다.
또한, 세종로에서 청계8가까지 건물6,026동의 상가가 형성되어있으면 이는 동대문시장주변의 의류, 패션상가와 재래시장주변의 가정용품, 기계공구상가등으로 이루어져있다.
복개된 청계천 지하에는 광통교, 장통교, 오간수문등의 약 20개 정도의 문화유적이 아직 남아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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