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일본의 풍수 침략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07.03.07 / 2019.12.24
  • 2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하고 싶은 말
일본의 풍수 침략에 대한 레포트입니다.....참고하셔서 좋은 점수 받으세여~~~~^^

본문내용
☙ 실생활 풍수지리와 전통문화
- 일본의 풍수 침략 -
일본의 풍수침략은 혈을 찌르기 위해 쇠말뚝을 박는 수법을 가장 많이 썼고, 이외에 도로나철로를 내면서 의도적으로 지맥을 끊었으며, 쇳물을 녹여 부었다. 뜸을 뜨기도 하였으며 (산꼭대기에 구덩이를 파고 며칠간 불을 놓아 뜸을 뜨거나 숯을 뜨기도 함), 숯을 묻었다.신성한 곳을 공원화했으며(창경궁과 전국 사직단의 공원화), 파괴하거나 폭파해 버린 것과(부여의 용머리를 파괴), 건물을 신축하는 등(총독부 건물이나 창경궁 장서각) 갖가지 수단을 동원했다. 지금부터 쇠말뚝을 빌어 이야기 해보자한다.일제 강점기 당시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지맥을 끊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풍수설에 따라 명산에서 흘러나오는 지맥은 민족의 정기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는 그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고 명산의 꼭대기에 쇠말뚝을 박아 넣어 지맥을 끊으려고 했다. 쇠말뚝은 지금도 각지의 산에 남아있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내서 뽑아 버려 민족의 정기를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쇠말뚝이 있던 곳을 예로 들자면 경상북도 청도군에 있는 주구산에서 발견된 말뚝은 직경 4센티, 길이 1미터의 말뚝으로 1995년 2월 14일 현장에서 산신령을 진정시키는 고유제를 지낸 다음 한 시간 반을 걸려 뽑아냈다. 쇠말뚝의 아래에는 석회가루를 넣고 박아 넣어 뽑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이 현장의 지형은 풍수설에 의하면 갈용음수형을 한 명당에 해당하는데 연구가들은 "일제가 용의 코에 해당하는 곳에 말뚝을 박아 인재가 나오지 않도록 했다" 고 말하고 있다. 또한, 같은 경상북도의 포항시에 있는 용산에서도 일제가 산의 지세를 끊기 위해 박은 지맥 절단 쇠말뚝(직경 1.5센티, 길이 1.5미터) 두 개를 제거했는데, 이 현장의 지세는 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고 쇠말뚝이 발견됐던 부분은 산세로부터 봐서 용의 등 척추에 해당하기 때문에 산의 정기를 끊어놓기 위해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다른 곳으로는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소재지 뒷산인 운수봉에서 발견한 쇠말뚝은 그 현장만 보면 별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역사]일제의 풍수침략에 대하여
  • 일본의 행위가 과연 측량용인가 풍수침략용인가에 관해서 정만 의문을 않가질 수 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이화씨나 ‘월간조선’이 단정하듯이 모든 쇠말뚝이 측량 표지용이라고 하는 근거도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본인 학자들이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대표적인 이가 현재 일본 오사카 시립대학교 문학부의 노자키 미츠히코 교수(野崎充彦, 조선문학 전공). 일본인이 박았다는 쇠말뚝에 대한 연구 및 한국의 풍수지리

  • 풍수침략 레포트
  • 일본의 행위가 과연 측량용인가 풍수침략용인가에 관해서 정만 의문을 않가질 수 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이화씨나 ‘월간조선’이 단정하듯이 모든 쇠말뚝이 측량 표지용이라고 하는 근거도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본인 학자들이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대표적인 이가 현재 일본 오사카 시립대학교 문학부의 노자키 미츠히코 교수(野崎充彦, 조선문학 전공). 일본인이 박았다는 쇠말뚝에 대한 연구 및 한국의 풍수지리

  • [한국전통문화의 이해] 남한산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 대한 풍수론적 연구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서경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논문-최영복, 2010, 남한산성 전통음식마을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조의영, 2005, 남한산성문화제를 통한 지역발전방안 연구, 관광경영학연구 제9권 제1호-박석희, 1998, 관광지의 이미지 구축에 관한 연구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경기관광연구 제2호-김덕삼, 2007, 남한산성 마을경관의 복원방향에 관한 연구, 한국조경학회지 34(6)

  • [문화기행] 충북지역 문화유적답사
  • 일본에 비해 석재를 많이 사용하는 목조건축문화를 가지게 되었으며, 우리 나라의 독특한 낮은 산세를 본뜬 곡선미가 탁월한 건축 조형미를 가지게 되었다.일반적으로 조선의 상류주택은 내외사상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안 공간과 남자들이 사용하는 밖의 공간으로 구분이 된다. 안공간인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이며 주택의 안쪽에 위치하였으며 가부장적 제도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랑채는 밖 공간으로 집안의 가부장과

  • 인문어학 조목
  •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저서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