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의 생애 5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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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백범김구의 생애(5단계)
가. 가계와 청년기의 수학
백범 김구는 고종 13년 (1876년) 음력 7월 11일 (양력 8월 29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 가량 떨어진 백운방 텃골이라는 가난한 농촌지역에서 태어났다. 백범의 첫 이름은 창암(昌巖)이었으며, 본관은 안동 김씨이며 김자겸이 효종 때에 역모에 열루되어 양반에서 몰락하여 상놈이 되었고, 주변의 양반들로부터 많은 수모를 당하였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1세 때 아버지가 집안에 세운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본격적으로 익히게 되었다. 백범 일지를 통해서 보면 어린 시절 백범의 성격은 퍽 대담하고 솔직한 것으로 보인다.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당시(唐詩)와 〈대학〉을 공부하고 과문(科文) 등을 익혔다. 17세때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慶試)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의 참상을 보고 실망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와 풍수지리서관상학병서 등을 읽으며 훈장을 지냈다.
나. 국내에서의 항일 구국운동
백범이 과거에 낙방한 뒤 실의와 좌절 속에서 병서를 읽으며 마음의 울분을 달래고 있을 1893년 말 경 황해도 해주 일대에 널리 퍼진 동학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동학의 평등주의에 감화되어 입도한 뒤 포덕(布德)에 힘을 기울여 접주(接主)가 되었다. 1894년 황해도 도유(都儒)로 뽑혀 보은집회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손병희(孫秉熙)를 만났으며,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라는 첩지를 받는 등 북접계열로 동학교문활동을 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친일정권은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공격하는 한편, 동학교도 전체를 비적(匪賊)으로 몰아 탄압했다. 귀향길에 농민전쟁을 목도한 그는 그해 9월 삼남에서 올라온 경통(敬通)에 호응하여 해주 죽산장(竹山場)에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깃발 아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배신한 우군(友軍) 이동엽(李東燁) 부대의 습격을 받아 대패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학군 토벌에 나선 신천(信川) 진사 안태훈(安泰勳:安重根의 아버지)의 집에 은거했으며, 위정척사계열인 유인석(柳麟錫)과 동문인 고능선(高能善)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명분론적인 세계관에 몰입하였다.
1895년에는 남만주로 건너가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참패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1896년 2월 귀국하여 안악(安岳)으로 오는 도중 하포(河浦)에서 일본군 중위 토전양량(土田壤亮)을 때려 죽인 뒤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었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되기 직전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정지되었으나, 일본공사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했다. 1898년 탈옥하여 삼남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雙溪寺)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그해 가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서울의 새절을 거쳐 평양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방주가 되었으나 1899년 환속하였다.
1900년 강화도로 건너가 개화인사들과 교유하고 교육과 계몽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 사고의 틀을 벗어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해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 백남훈(白南薰)에게 인계하고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
1905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 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한 뒤, 대한문 앞에서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가두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 1906년 종산 서명의숙(西明義塾)의 교원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안악 양산학교(楊山學校)의 교원이 되었다.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을 겸했다. 1908년에는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學務總監)에 추대 되어 도내 각지 강습소를 다니며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강연 주제는 "한인이 배일(排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 등이었다. 이때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저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사건관련자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났다.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는 비밀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이 되었으며, 1910년 양기탁(梁起鐸)이 소집한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국내에서는 무력 항쟁을 하고 만주에는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일제와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1911년 1월에 일제의 사내정의(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라는 일제의 조작극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7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중 감형되어1914년 7월 가출옥되었다. 수감 중에 이름을 구(九) 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쳤다. 1915년 양산학교장인 김홍량의 동산평농장(東山坪農場) 농감(農監)이 되어 학교를 세우고소작인을 교육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다. 상해(上海)로의 망명과 초기 독립운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백범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보다는 해외에서의 활동이 보다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해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로 망명한 그는 임시정부의 문파수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안창호의 추천과 만류로으로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1923년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진로를 둘러싸고 제기된 창조론(創造論)과 개조론(改組論) 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련된 국민대표회가 분열로 치닫자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하였다. 1924년 국무총리대리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27년 약화된 당시 임정의 처지와 구성원상 국무령제로는 내각 구성조차 어려워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 겸 주석이 되었다. 이러한 임정활동에서 그는 사회주의를 배척 반대했으며,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에 대하여는 별다른 비판을 하지않았다. 1928년 사회주의계열을 제외한 민족주의계열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동녕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했다.
1932년에는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했다.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거가 대표적인 사례이며, 이는 독립운동계에 민족정신의 자세를 재확립케 하여 주는 귀중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일경의 탄압이 강화되자 상해를 탈출했다. 1933년 남경(南京)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광복군 무관양성소 설치와 항일전투방략을 협의했다. 1934년 국무위원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의정원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라. 임시정부의 부흥과 후기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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