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쎄시봉 - 쎄시봉(c`est si bon)을 알다, 쎄시봉이란, 명동 통기타 살롱의 등장과 부흥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6.08.14 / 2016.08.14
  • 4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넌 감동이었어! 추억의 쎄시봉
● 쎄시봉(cest si bon)을 알다
평소 ‘선택장애’를 가지고 있는 나지만 교수님께서 개인 과제를 내주셨을 때엔 내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떠오는 세 글자가 있었다. 바로 ‘쎄시봉’! 쎄시봉? 아이스크림 이름도 아니고 사탕 이름도 아니고 이게 뭘까? 라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다. 첫째, 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 둘째, 대중음악사 수업을 수강하지 않은 사람 셋째, MBC예능 프로그램 ‘놀러와’를 보지 않은 사람이면 말이다. 처음 내 머릿속에 쎄시봉이 각인 되었던 것은 추석 특집 ‘놀러와’를 통해서였다. 예전에 뉴스 기사로 ‘놀러와’에 조영남, 송창식 등 옛 통기타 음악을 이끌던 가수들이 출연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평소 예능프로그램을 다시보기로 챙겨 볼 정도로 마니아 이지만 요즘 예능은 아이돌가수들이 점령한 마당에 그들의 출연은 내 마음을 이끌기엔 지루할 것만 같고 그리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간과하고 있던 중 어느 날 집에 가니 항상 리모콘 싸움에 바쁜 아버지, 어머니, 동생이 단합하여 티비에 푹 빠져 있던 게 아닌가. 그 프로그램이 바로 놀러와 쎄씨봉 특집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함께 시청하면서 그렇게 쎄시봉 가수와 그들의 음악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 쎄시봉이란?
‘쎄씨봉’이란 70~80년대를 주름잡았던 포크 가수들이 활동하던 음악 감상실이 이름으로 그날의 출연자인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과 그 외 김민기, 이장희 등의 가수을 배출한 당시 최고의 음악감상실로 모두 집으로 여길 정도로 (실제로 어려운 가정환경이었던 송창식씨는 실제로 거주 했다고 한다) 자주 드나들며 음악활동을 펼쳤던 곳이다. 그 당시에 서울의 음악 감상실은 주로 명동에 몰려 있었는데 클래식만 틀어주던 ‘르네상스’, 클래식과 경음악을 겸했던 ‘SS와 ’돌체‘ 그리고 경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쎄시봉‘,’은하수‘등이 있었다.
이 중 쎄시봉은 소공동에 위치한 가장 유명한 음악실로 실제로는 대부분 교복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오는 속칭 날나리 고등학생이 대부분이었으며 요즘은 음반를 구입하거나 컴퓨터로 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그 당시 우리 부모님 시절은 좋은 오디오도 흔하지 않고 레코드 값이 비싸 부담이 되어 쉽게 음악을 들을 수 없었는데 쎄시봉은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차,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며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해소 해주었던 곳이라 한다. 아마 그 당시 쎄시봉의 첫 출입하는 느낌은 내가 스무 살이 되어 처음 클럽에 가 보았을 때 그 생소한 느낌과 비슷할 것만 같았다. 남녀가 어울리는 낯선 분위기와 시끄러운 음악 하지만 음악을 들으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그곳에 익숙하게 되어 자주 찾게 되는 그런 곳이 아니었을 까란 공통점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쎄시봉은 음악 감상이라는 역할 외에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을까? 알아보았다.
첫째, ‘통기타 시대의 출발’이다. 통기타라 하면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의자에 앉아 듀엣으로 기타를 치는 무대 위 모습이 자연스레 생각나는데 당시 음악 살롱 혹은 음악 감상실이라고 불리던 곳 중 가장 유명한 쎄시봉은 당시 통기타 가수라면 누구나 거치고 싶어 하던 유명한 무대였다. 소위 통기타 1세대로 불리던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김도향, 서유석, 김세환 등이 이곳 출신이며 양희은은 쎄시봉 다음으로 인기를 누렸던 오비스 캐빈에서 주로 활동하였지만 고등학교 YMCA활동 시절부터 이 1세대들과 함께 움직였다. 또한 통기타 가수로 잘 알려진 김민기나 한 대수, 양병집, 서유석을 뽑을 수 있는데 지금은 우리나라 역사적인 포크전사로 재평가되어 거론되지만 과거 이들은 소박하게 말해 음악 살롱에서 노래하는 통기타 가수들이었으며 이들 모두 쎄시봉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 포크음악을 이끄는 거물들로 성장하게 된다.
둘째, ‘젊음의 명소’였다. 쎄시봉은 젊은이들에게 한마디로 친근한 곳이었다. 우리도 친근한 곳에 자주 찾고 편한 곳이 익숙하듯 이미 텔레비전이나 고고장을 통해 팝음악이 익숙한 젊은이들에게 계속 클래식만 틀어대는 다른 음악 감상실보다는 샹송이나 칸소네, 팝송을 주로 들을 수 있는 편안하고 친근한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이곳의 인기 비결이었으며 게다가 커피 한잔 값이면 하루 종일 편안한 의자에 앉아 마음껏 놀다 갈수 있었으니 쎄시봉이 명소가 된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또한 쎄시봉은 음악 감상실이라는 틀에서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이벤트를 벌여 젊은이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대학생의 밤, 신인가수 선발대회, 시인만세, 스타와의 만남 등 다양한 아마추어들의 무대가 마련되었고 자연스럽게 끼있는 젊은이들이 하나 둘 모여 재능을 발휘하고 또 인기를 모아 쎄시봉 스타군단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자유분방한 분위기는 다양한 분야의 젊은이들을 모이게 했다. 실제로 쎄시봉에서 사회를 보고 여러 이벤트를 제안하기도 했던 ‘이백천’이나 ‘정홍택’은 방송언론 쪽 인물이었고 ‘이장호’나 ‘최인호’같은 영화, 문단 등 예술계 젊은이들도 여럿 쎄시봉으로 모였다.
셋째, 아마추어에서 프로로의 관문이다. 당시 살롱가수들은 대체로 아마추어였다. 대부분 신분이 대학생이었던 그들은 자기의 재능도 발휘하고 용돈을 벌 겸 살롱 무대에 올랐다. 서울대학교 음대생이었던 조영남은 트로트를 성악 발성법으로 불러 주목받고 바로 쎄시봉에 데뷔하였으며, ‘놀러와’를 보니 송창식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노숙생활도 3년간 하며 떠돌다 우연히 친구가 있던 홍익대학교 잔디밭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던 중 쎄시봉 관계자에 눈에 띄어 노래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성악을 전공하였지만 돈이 없어 학업을 접을 형편이었는데 노래를 계속할수 있었으며 당시에 오페라를 품위 있게 보통 발성으로 편안하게 불러 모두의 환호를 받았다고 한다. 또 이장희가 시낭송을 할 때면 여대생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지금은 기라성 같은 음악계 거장들이지만 모두가 아마추어 무대 출신인 것이다. 또 전문가로 부터 인정을 받고 음반을 내거나 미군 무대에 서는 프로가수를 겸하기도 했다. 훗날 이들 대부분이 가수나 디제이, MC로 방송에 진출한다. 조영남은 이백천의 소개로 서게 된 미8군 무대에서 딜라일라등을 히트시켰고 이장희는 쎄시봉의 sunny의 히트 이 후 라디오에서 활동, 젊은이들의 기호에 맞는 음악을 소개해 DJ계의 선각자로 불리기도 하였다. 또 홍익대학교 학생이던 이상벽은 쎄시봉에서 정기적으로 MC를 보았고 이곳의 인맥을 바탕으로 기자생활과 방송생활을 했다.
송창식과 윤형주는 본래 쎄시봉 트리오로 출발했었다. 하지만 한 멤버가 군대 문제로 빠지게 되면서 새로 팀을 정비한 것이 트윈 폴리오이다. 두 사람은 쎄시봉의 큰 인기에 힘입어 69년 하얀 손수건이라는 번안 곡 앨범을 냈다. 이들의 음악은 당시 노래들은 애상조의 것과 달리 경쾌한 통기타 선율과 아름답고 맑은 화음으로 순식간에 젊은이들을 사로잡으며 히트시켰다. 그리고 싱어송 라이터 한 대수의 등장은 아무리 창작을 한다해도 번안곡 일색이던 통기타 음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 명동 통기타 살롱의 등장과 부흥
쎄시봉의 뒤를 이은 음악 살롱은 명동의 오비스캐빈이었다. 없는 원판이 없다 할 정도로 수많은 원판들을 보유해 했던 심지다방이 ‘오비스캐빈’의 원조인데 이곳은 팝송 매니아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곳 이었다. 젊은이들 사이에 통기타 붐이 일자 69년 심지다방은 오비스캐빈으로 다시 태어난다. 무교동 세시봉 시대를 마감한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김도향, 서유석, 김세환, 양희은 같은 통기타 1세대들이 대거 ‘오피스 캐빈’ 무대에 섰다. 세련되면서도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잘 살렸던 오비스 캐빈은 문을 열자마자 젊은이 명소로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또한 70년대 중반에 ‘쉘부르’가 문을 열면서 통기타 시대 전성기를 구가했다. 지금은 가장 보편적인 술이 된 생맥주가 붐을 일으키며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 무대에는 이문세, 남궁옥분, 전영, 신형원 같은 통기타 2세대들이 주로 출연했다. 하지만 70년대 말부터 명동 통기타 살롱들은 급속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그 이유는 비지스, ABBA 등 가요계에 분 디스코의 바람과 77년 시작된 대학가요제 등장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통기타살롱 출신 DJ들은 70년 초반부터 외국 음악들을 계속해서 소개해 왔다. 그렇게 이런 팝송 프로그램 등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의 음악취향은 폭넓고 다양해지면서 통기타의 쇠락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또한 대학가요제는 젊은 취향의 박력 있고 발랄한 음악을 담아내 보기 좋게 포장했고 그것을 통해 젊은이들은 힘 있고 다양한 음악을 발산하고 또 즐겼다. 그렇게 나약하고 서정적이고 단순한 통기타 음악의 한계와 더불어 통기타 살롱은 하나 둘 문을 닫았고 통기타 가수들은 시대적 한계에 부딪히며 그들의 무대를 잃었게 되었다. 우리 대중음악사에 젊음의 낭만이 가장 넘쳤던 시절로 기록될 70년대 명동 통기타 시대. 이제 그 현장들은 이제 경찰의 눈을 피해 명동 뒷골목을 숨어 다니던 장발 세대의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 그 시절, 쎄시봉 출신 가수들
60년대 말부터 서울의 끼가 많은 젊은이들은 쎄시봉이라는 음악 감상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이곳에는 다양한 부류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그 젊은이들의 중심에는 통기타를 치며 샹송이나 칸소네 또는 팝송을 부르는 아마추어 가수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들을 포크가수라고 불렀다. 60년대 초부터 미국에는 포크음악의 바람이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국내에서는 한대수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젊은이들 사이에는 청바지, 장발, 생맥주, 통기타 등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문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음악적으로도 포크의 영향이 반영되었으며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 서유석 등의 포크의 핵이 형성되었다. 이 포크 음악은 쎄시봉의 통기타 가수들에게도 영향이 미쳤다. 미국 본토의 포크음악을 접하던 한대수는 69년 9월 국내에서 콘서트를 열었고 그것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젊은이들은 그가 장발에 청바지를 입고 목에 하모니카를 걸고 부르짖듯 노래하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쎄시봉의 통기타 가수들은 그에게서 누구라도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인문과학 샹송과 에디뜨 피아프
  • 등장한다. 이렇게 샹송의 서민 성을 체현한 피아프는 전쟁의 폐허 속에 있던 프랑스 인들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피아프가 1947년 워싱턴 홀에서 미국 데뷔 공연을 할 때 미국인들은 명성이 자자한 샹송의 신데렐라를 보러 몰려들었다. 잔뜩 기대에 부푼 청중들은 웬 조그만 여자가 볼품 없는 걸음걸이로 무대에 오르자 저게 에디뜨 피아프야?하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그러나 공연이 시작되자 그 몸집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우람한 성량으로 열

  • [국제관광] 세계관광 현황과(하와이, 프랑스 사례)과 부산 관광의 실태및 개선방향
  • 추억을 주고 있으며, 본공연 외에도 시상식, 팬사인회, 록프라자, 기념품 판매 등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지고 있다.③시티투어부산에서는 시티투어 버스를 운행함으로써 부산을 방문한 관광객들로 하여금 부산의 주요관광지를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부산 시티투어버스는 다양한 멀티미디어 관광정보를 제공하고, 인터넷 이용 및 DMB 시청이 가능하다. 또한 여러 외국인 방문객들을 위하여 영어, 중국어, 일본어 관광 안내 서비스를 제공

  • [대중문화] 70년대 청년문화의 시작과 발전
  • 지친 사람들을 흥겹고 가벼운 음악으로 매료시켰다.)펑키 디스코의 노래로는 ‘한동안 뜸했었지’(사랑과 평화), ‘제3한강교’(혜은이), ‘밤차’(이은하), ‘마음약해서’(들고양이들) 외에 ‘영원한 친구’(나미)와 ‘일곱 빛깔 무지개’(작은거인) 등이 있다.1. 1970년대 통기타 세대 (1) 통기타 시대의 출발, 쎄시봉 (2) 한대수와 김민기 (3) 쎄시봉 가수들의 성공2. 새로운 사운드, 고고의 시대 (1) 대학가요제(2) 산울림(3) 펑키 디스코 열풍

  • [불문학사] 자연주의(Naturalisme)
  • c)낭만주의 시대의 한복판에서 자라나, 그 모든 투쟁의 갈피를 샅샅이 살아 온 보들레르는,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마음의 참회소를 마련하고,거기서 자기의 내심의 왕국을 탐구했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들』의 시인인 동시에 『낭만파 예술 LArt romantique』과 『심미적 호기심 Curiosité esthétique』을 쓴 날카로운 비평가이기도 했다. 시인으로서의 천재적 직관에 못지않는 명철한 이지를 가지고, 그는 내면생활의 심연을 파고 들었다.그는 거기서 악덕

  • 문화콘텐츠의 이해와 발전
  • C세대, 새로운 소비층과 소비문화 등장 3. 기업전망 : 대기업 참여확대 및 문화콘텐츠주의 주식시장 부상 4. 제작전망 : 온라인 및 모바일 기반의 콘텐츠 제작 확대 5. 기술전망 : CT(문화콘텐츠기술)의 산업적 활용 증대 6. 매체전망 : DMB, WiBro, PMP, IPTV 서비스 본격화로 콘텐츠 수요 증가 7. 저작권전망 : 유료화 확산과 저작권 강화 8. 소재전망 : 한국적 소재의 부상과 인기 집중 9. 지역문화전망 : 지역별 문화콘텐츠산업 성장동력화 확산 10. 여가전망 :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