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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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영화 축제는 치매에 걸린 어느 할머니가 곱게 단장을 하고 17살에 시집온 뒤 78세가 되기까지 한번도 가지 못했던 친정을 가고자 집을 나서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여인은 17살에 시집와서 6년만에 시부모님과 남편을 모두 떠나보내고 7남매를 어렵게 키워냈고 장남은 비록 한량이었지만 차남은 훌륭한 작가로 키워냈다. 이렇듯 한 많은 삶을 살다간 할머니의 죽음이 축제라는 영화의 소재이다. 즉 할머니의 죽음을 둘러싸고 할머니가 임종하시는 날부터 하관의 날까지 할머니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가족들간의 갈등과 아귀다툼,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러한 갈등이 해결되지는 않지만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고 있는 영화이다.
축제를 통해 감독이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약간 독특한데, 감독은 죽음을 단순히 인생의 종지부로 인식하기보다는 나름대로 죽음에 더욱 고차원적인 의미를 영화전반에서 관객에게 암시하며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생의 사고가 생노병사라 하여 죽음을 인생의 고통으로 간주하는 옛말과는 달리 죽음을 삶의 변화가운데 하나로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안에서는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는 경건한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척이나 이웃들의 모임이기도 하고 그 모임이 엄숙하고 경건하기보다는 하나의 잔치성격을 띄고 있다. 술을 마시고, 오랫동안 못 본 사람을 만나 회포를 풀고 서로 근황을 묻고 화투를 치고 영정이 놓인 밖의 세상은 축제분위기나 다름없는 풍경을 보여준다. 한국의 장례식은 고인의 죽음으로 고인과 관련된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이는데 이로보아 외국의 문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장례식장을 서구처럼 단순히 애도의 공간으로 머물지 않고 친목의 공간, 만남의 공간, 화합의 공간, 용서의 공간 등으로 볼 수 있다. 솔직히 많은 사람이 한번에 모이는 건 어렵지 않은가? 비록 죽음의 형태로 모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일종의 축제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제목은 축제인데 내용은 장례식을 다루며 사람의 죽음의 의식을 축제라고 표현한 점이 아무리 생각해도 특이한 것 같다. 살아가면서 사람은 모두 죽게 된다. 그 선명한 사실 위에서 인간은 살아간다. 그리하여 막연히 불안하고 때때로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몸을 떤다.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슴 저 밑바닥에 담아놓고 산다. 영화 축제는 이 궁극의 물음에 대한 이유 제시이며 아픔의 승화다. 영화가 만들어지게 되는 과정이 그러하며 제목 또한 이 물음의 파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삶과 죽음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죽음은 장례를 통해 축제로 만들어지고, 이 과정은 영화에 삽입된 동화적 상상력으로 현실성의 힘을 얻는다. 영화의 한 부분에서 나오는 것처럼, 할머니가 손녀에게 스스로의 나이를 모두 나누어주고 결국은 어린 아이가 돼 세상을 떠나는 설정은 지극히 비현실적이지만 죽음은 원래 그런 것이다. 가장 비현실적이면서도 가장 선명한 현실이 죽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되면 죽는다. 그리고 실감나지 않지만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축제는 만들어지게 되는 여러 과정에서 흥미롭다. 원작이 있고 영화가 있다. 그러나 기존에 소설을 영화화했던 작품들과는 태생적으로 다르다. 먼저 소설이 나오고 그것을 시나리오로 각색한 후 영화를 찍는 방식인데 축제는 소설과 영화가 동시작업으로 함께 만들어진 우리 영화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보적 작품이다.
사람이 신으로 변모하는 축제, 죽음의 영화 축제는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오래 전 접어둔 일기장을 들추듯이 장례식의 시간을 보여준다. 노인이 세상을 뜨고 침울하게 가라앉은 집 안은 밤에 문상객들이 밀려들면서 돌변한다. 여기저기서 노름판이 벌어진다.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 조의금을 슬쩍해서 노름을 계속하는 사람도 있고 윷놀다 본전 생각을 떨치지 못해 멱살을 다잡는 행위들이 줄곧 오버랩 된다. 소리꾼은 제 본분을 잊은 채 만취해서 초경까지 인사불성이다. 본질적으로 이런 행위들은 장례의 생생한 모습이며 축제의 단면과 닮아 있다. 가장 슬픈 의식을 치러내는 현실의 이면 안에 이미 축제의 본질이 스며 있었다. 장례는 사람이 신격화되는 순간을 기념하는 의식일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으면 한 가정의 신이 된다. 인간이 비로소 육신을 덜고 신이 되는 마지막 통과의례로서의 장례이며 그러므로 축제이다.
죽은 자의 입장에서도 죽음은 축제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죽음은 한을 쌓는 행위와의 작별을 의미하며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의 연장선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온갖 번뇌의 시간에서 완전한 무의 세계로 나아감이다. 죽은 자에게도 죽음은 축제다. 소설과 영화가 근본적으로 꿈꾸는 자리는 아마도 인간의 모든 한이 풀리는 그 지점일 것이다. 축제는 명확한 죽음의 자리를 이미지로 승화해 근원적 고통과 마주한다. 그러나 막연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인간은 어느 상갓집에서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대비한 축제를 벌인다. 영화 축제는 임권택 감독 특유의 한국적인 영상미가 있는 영화이지만, 무엇보다도 동양적, 한국적인 죽음관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죽음과 그 이후의 저승세계가 무섭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이 편안한 안식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것! 죽은 할머니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또 고통 없이 죽은 이의 모습을 보면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모인 친척들과 마을사람들이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결국 장례과정을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이러한 의미에서 할머니의 죽음은 화합의 장이 된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한번쯤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작품이다. 영화에서도 장례가 엄숙한 형식이라고 하면서, 또 장례에 쓰이는 지팡이가 작은 이유는 부모 죽인 죄인이기에 허리 펴고 하늘 보지 말란 뜻을 담고 있다고 하면서 제목을 왜 블랙코미디 같은 이미지를 주었을까?
<우리글 바로쓰기>에서 이오덕은 우리나라의 제사는 조용하고 엄숙해서 제 앞에 축을 붙일 수 없다고 했다. 일본의 장례식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치러지니 祝란 글자가 어울리지만 우리나라의 장례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오덕의 해석은 단지 말로써의 해석일 뿐이고, 우리 국민에게 흐르고 있는 피는 그걸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조상이 지혜로웠던 건 그런 현실을 축제화 시켰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유문화에는 그런 것들이 많은데 마을의 공동노동인 두레가 그렇고, 절기에 따라 행해지던 농부들의 행사가 그렇다. 힘든 노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축제처럼 장을 만들어 먹고 즐기지만 그 먹고 즐기는 가운데 제에 대한 경건한 마음도 들어있다. 엄숙히 치러야할 대소사지만 사는 일이 팍팍하고, 그것에 대한 힘겨움을 알고 있기에 경축하는 가운데 제를 지내는 지혜를 짜낸 것이다. 죽음 바로 직전까지 늘 죽음을 준비하는 것, 그래서 죽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해 사는 자세. 그것이 바로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제가 아니고 무엇일까? 그런 마음을 나는 나 아닌 소중한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야 할 때도 자주 인용한다. 오늘까지만 살고 내일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과연 나는 이 사람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라고 미리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서서 내게 도움을 구하는 이에게 좀 더 다정할 수 있다. 비록 아주 큰 도움은 줄 수 없지만 좀 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좀 더 그의 위로가 되어주고, 좀 더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것이다. 내일 죽을 것이기에, 오늘이 아니면 영영 못 볼 것이기에 당장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지만 귀찮아서 하지 않게 되는 일들도 해줄 수 있다.
노모가 치매에 걸리기 전, 아니 치매에 걸려서도 노모는 스스로 죽음을 준비해 왔다. 하루에 세 군데의 절을 찾아다니며 자식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부적을 모았고 비록 새색시 때 받은 옷이지만 당신 스스로 죽기 전에 그 옷을 입고 싶어 하였다. 나이가 들어 우리들의 부모가 당신이 입고 가실 수의를 미리 준비해놓는 것처럼 영화 속의 노모 역시 당신이 죽을 날을 손수 준비하셨다. 자식들이 태어났을 때 키와 지혜를 조금씩 나눠주고, 그 자식들이 다 자라자 손녀에게까지 나눠주는 것. 그렇게 노모는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내어주고 마지막은 홀가분하고 행복하게 떠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승에 대한 미련이 어찌 있을 것이며 한 많은 이승의 삶을 떠나는 것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었겠는가. 축제를 보면서 나는 잘 몰랐던 장례의식을 공부한 것 같아 그것으로 족하다. 큰 감동을 주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돌아가시고 난 직후부터 땅 속에 관을 묻을 때까지의 그 모든 절차가 내겐 또 다른 볼거리였다. 그리고 관이 문지방을 넘어설 때 왜 박을 깨고 가는지, 상주들의 상복이 왜 반쪽만 걸치는 장면이 나오는지 따로 공부할 수 있어서도 좋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편의 다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물론 좋은 공부이긴 하지만 영화로서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 아닌지.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고 판단했겠지만! 영화속의 자막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그 군데군데 놓인 돌멩이들 같았다. 끝으로 영화는 액자소설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장례식 이야기와 나란히 동화 같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결국 극중 작가가 쓴 동화의 내용이라는 점이 끝 무렵 밝혀지면서 설득력을 얻긴 하는데, 영화의 흐름을 끊는다. 꼭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소설 축제의 구성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건 아닌지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축제라는 영화는 장의 손길이 닿은 작품답게 생동감 넘치고, 좋은 영상들로 볼 근거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내게 있어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한국 전통장례를 체험하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죽음을 보는 우리의 시선, 죽음에 대한 우리 목소리를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살펴 본 것과 같이 소설 축제 와 영화 축제 는 같은 대상을 바라보고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개성과 경험의 차이에 의해 서로 상이한 모습을 띠게 된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러한 개성의 차이에 의한 결과는 동시진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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