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 법가 철학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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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가 철학과 현실
1. 법가사상이 출현하게 된 시대적 배경
주 왕조는 봉건제를 기반으로 300여년 간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왕실과 제후 사이의 혈연으로 맺어진 친족적 관계는 멀어지고 신분관계가 무너짐에 따라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대로 제후들의 세력은 강화되어 가고 제후들 가운데 강성한 자가 나타나 스스로 패자라고 불렀습니다. 패자는 스스로 여러 제후들의 맹주로서 그들을 실력으로 지배했습니다. 이 때 마침 서북쪽에서 견융이 침입하자 중국은 춘추 전국(B.C. 770 ~ B.C. 221)이라고 하는 분열과 전쟁의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패자들은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정부가 필요했습니다. 당시의 자유사상가들인 제자백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으나 대부분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대안이 아니라 지나치게 이상적인 정책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현실을 똑바로 보고 구체적이고도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아는 인재’라는 뜻의 ‘법술지사’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이들이 훗날 법가(法家)라고 일컬어지는 사상가들입니다. 이들은 통치자가 통치력을 완전히 장악하는 방법은 엄격한 법의 집행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법가사상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한 유파로 그 계통을 이은 일군(一群)의 정치 사상가에 대한 총칭이다. 특히 유가(儒家) 사상과의 대립 ·항쟁 과정에서 발달하였으며, 전국시대의 전제적 지배를 지향한 군주에게 채용되어, 진(秦) ·한(漢)나라의 통일제국 성립을 뒷받침한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질서 있는 정치를 주장한 장점이 있고, 오로지 형법(刑法)에 의거하여 때로는 육친의 정까지도 저버린 것이 단점이라는 평도 있다. 위(魏)나라의 문후(文侯)를 받들어 부국강병의 실적을 올린 이회(李:BC 455?∼BC 395?), 진(秦)나라의 재상으로 국내개혁을 달성한 상앙(商:?∼BC 338), 저서를 통하여 진시황(秦始皇)을 감탄시킨 한비자(韓非子:?∼BC 233), 진(秦) 통일제국의 기초를 구축한 이사(李斯:?∼BC 210), 전한(前漢)의 중앙집권화에 힘쓴 조조(錯:?∼BC 154), 무제(武帝) 때의 유능한 경제관료 상홍양(桑弘羊:?∼ BC 80) 등이 법가의 대표자들이다. 현대에 와서 중국은 유가들이 노예주인 귀족층의 세습적 권리를 옹호한 것에 대하여, 법가들은 새로운 봉건 지주계급을 대표하여 국내통일에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한다.
2 한비자의 스승인 순자
순자(荀子, 기원전 298~기원전 238)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면서, 옛 성현들의 가르침에 따라 끊임없이 행실을 갈고 닦아 “악한 본성을 변화시켜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化性起僞).”고 하였다. 그는 악한 성품에 대비해 ‘예(禮)’의 실천과 교육을 강조하였고, 정치도 ‘예치(禮治)’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예란, 인간의 질서 있는 생활을 외적으로 규제하는 도덕 규범을 의미하는 것으로, 순자는 사람에게 예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고, 도모하는 일에 예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으며, 국가에 예가 없으면 사회의 안정을 이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순자는 인의(仁義)의 도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외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강력한 예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순자의 예치로서, 맹자가 어지로운 사회속에서도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믿고자 했던것과는 입장과는 다른 점이다.
한비 이전의 법가 사상
상앙 : 백성들의 개인적인 이익의 추구를 막고 나라의 이익을 우선하는 원칙을 의미하는 법(法)을 강조했다
신불해:신하들이 내세우는 이론과 비판이 그들의 행동과 일치하게 하는 기술을 의미하는 술(術)을 강조했다
신도 : 군주만이 가지는 배타적이고 유일한 신하들을 잘 조종해 군주의 자리를 더욱 굳게 하는 인사정책을 의미하는 세(勢)를 강조했다
한비자는 위 세 학파의 주장을 모두 수용해 발전하였고 세 가지의 통치 도구를 모두 갖춰야만 진정한 군주라고 하였다. 한비에 의하면 일찍이 현명한 군주가 제도를 시행할 때는 하늘같이 공평하게 원칙을 지키고 인물을 가려 뽑을 때는 귀신같이 밝았으므로 그를 비난하거나 곤경에 빠뜨리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3. 법가를 대표하는 한비자
법가를 대표하는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기원전 233)는 전국 시대 말기에 활동한 한나라 명문귀족의 후예이다. 그는 자라면서 이사와 함께 유학자인 순자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가 보았고, 따라서 인간을 조정하는 것은 상호간의 믿음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제되는 당근과 채찍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러한 법(法)이 당근과 채찍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법가 사상을 체계화하였으며, “인간은 이기적이며 간사한 지혜에 차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고, 오직 상과 벌로써만 조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국가는 철저하게 형법(刑法)에 의지해 통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비는 비록 진나라에서 죽음을 당했지만 그의 법가사상은 진나라 정권의 지도원칙이 돼 훗날 진나라의 통일에 기여했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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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한비자>> 한비 지음 홍익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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