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호남의 예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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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호남의 예술사상
1. 판소리란 ?
부채를 든 한 사람의 창자(소리꾼)가 한 사람의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아니리(말), 너름새(몸짓)를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인 음악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소리꾼(倡優:판소리를 전문으로 하는 가수)이 부르는 서사적인 노래를 한문으로는 잡가(雜歌), 본사가, 창가, 극가 등으로 치고 있으나 본디 우리말로는 판소리라 일러 왔다. 판소리란 판놀음으로 연행되는 소리라는 뜻이다.
판소리는, 우리 전통예술의 특질인 자유분방함과 임의성, 즉흥성이 잘 나타나 있는데 예를 들면 송흥록代까지는 정확한 대본없이 스승으로부터 익힌 사설에다 구전가요나 재담등을 즉흥적으로 삽입하여 구연(口演)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는 엄청난 사설의 양으로 보아 사설이나 창법의 정확한 전승이 어려웠다기 보다도 청중의 감흥을 중요시한 방법으로서 소리꾼의 가변성과 즉흥적 윤색을 용인하는 것으로, 이것이 판소리의 특성이자 묘미이다.
2. 판소리의 역사
판소리는 18세기 초(숙종-영조때 AD 1674-1776)에 발생한 것으로 18세기 중엽에 이미 형성의 완성 단계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판소리의 기원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신라의 화랑과 관련되며 그 직접적 계보는 산대잡희의 한 과정이었던 극적 노래의 분화로 보고 있다. 판소리는 그 발생의 바탕이 되는 설화를 근간으로 하여 구전가요, 무가, 공연 현장에서의 감흥을 위한 재담 등 여러 문화적 요인들이 첨가되어 변화해온 적층적 문화형태라는 형성 과정을 가지고 있다.
19세기에 들어 판소리는 양반들을 대상으로 전성기를 맞았는데, 19세기 전반기를 전기 8명창시대라 하고, 19세기 후반기를 후기 8명창시대라고 한다. 권삼득, 황해천, 송홍록, 방만춘, 염계달, 모홍갑, 김계철, 고소관, 신만엽, 송광록, 주덕기 등의 전기 8명창들은 각기 특색 있는 창법과 선율을 개발하여 양반들의 감상과 미의식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려 했으며, 각 지역의 민요 선율을 판소리에 담아냄으로써 판소리의 표현력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박유전, 박만순, 이날치, 김세종, 송우룡, 정창업, 정춘풍, 장자백 등 후기 8명창들은 전기 8명창들의 음악적 업적을 계승하고 이를 다듬어 다양한 더늠(長短)을 창출했다. 이 시기에 박유전에 의해 보다 서민적인 감성에 충실한 서편제 소리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판소리는 더욱 다양하고 강한 흥행성을 띤 예술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마침내 19세기 후반에 판소리는 왕실에까지 침투하게 되었고, 고종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많은 창우들은 벼슬을 받기도 했다.
19세기부터 판소리의 주요 청중은 양반으로 바뀌면서 이전의 서민의식은 상당히 수정되었다. 덕분에 판소리는 사설, 음악, 무대 등에서 진경을 이루었으나 민중적 현실인식과 반봉건적 예술적 심화나 문제의식은 일정하게 수정되어 얼마간은 봉건적 의식의 개입 가지도 허용하는 굴절을 겪었다.
조선 고종 때의 판소리 작가 신재효는 중인 출신으로서 판소리 광대를 적극 후원하면서, 양반들의 미의식에 걸 맞는 판소리의 개작을 시도했는데, 이때 판소리 6마당의 사설집과 성조가, 광대가 등의 창작 단가들이 만들어졌다.
20세기는 전기 5명창 시대로 일컬어진다. 그 당시 활동한 명창들은 박기홍, 전도성, 김창환, 이동백, 김창룡, 김채만, 정정렬 등이다. 이때는 국권상실과 급격한 서구화의 충격으로 판소리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가 마침내는 사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 시기이다. 이 시기 판소리의 변화는 무대예술로서의 변화로 요약할 수 있다. 1902년 기생, 광대 등의 단체인 협률사가 만들어지면서 판소리는 극적 요소가 강한 창극으로 변신했다. 또한 유성기의 출현으로 판소리의 향수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본래 광대는 남자들이 하던 것이었는데 신재효의 제자 진채선이 최초의 여창이 된 후 허금파, 강소춘, 이화중선, 박녹주 등 여창이 다수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으로 판소리의 소리, 발림 등이 여성화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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