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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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1574년에 이황의 제자들이 그보다 4년 앞서 세상을 떠난 이황의 학덕을 기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도산서원의 위치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번지에 위치하여 있다. 본래 이 자리는 이황이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안동댐의 건설로 인하여 호수처럼 변한 낙동강의 상류를 굽어보는 지점에 있다.
지금도 도산서원은 두 구역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서원 앞 우물이 있는 넓은 마당을 거쳐 문을 들어서면, 바로 만나는 도산서당과 농운정사,그리고 그 아래 별채인 역락서재, 이 세 건물이 한 구역인데 이것들이 이황이 살아계실 때 있던 건물들이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사이로 난 경사진 길을 잘 다듬어진 계단을 딛고 올라가면 진도문이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도산서원인데 이황 사후에 만들어진 많은 건물들이 있다.
맨 위층부터 살펴보면 이황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상덕사가 있고, 그 아래에 강당인 전교당이 있으며, 전교당 앞에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재(박약재)와 서재(홍의재)가 마주 보고 있다. 동재 뒷편에 장판각이 있고, 동서 양재 아래로는 진도문을 사이에 두고 동서 광명실이 있다. 또 상덕사와 전교당 사이에 난 작은 문을 통해 서쪽으로 나가면 전사청이 있고, 그 아래로는 상하 2개의 고직사가 있다.
사원의 기능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존현(尊賢-선현을 추모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양사(養士-선비를 양성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도산서원의 건물을 구분하면, 전교당과 동서 양재, 장판각,광명실 등은 강학의 공간이고, 상덕사를 중심으로 한 전사청 등은 존현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사당인 상덕사는 전교당 뒷편의 한층 높고 그윽한 곳에 따로 출입문인 삼문을 두고 별도로 담장이 둘러진 안에 있다.
서원의 현실적 공간은 전교당이 중심이지만, 정신적 공간은 상덕사인 것이다. 도산서원은 일반적인 서원의 전형적 구조인 전당후묘(前堂後廟)의 양식이다. 현재 사적 제 170호에 지정되어있다.
이황(李滉) (1501 ~ 1570)(연산군 7 ~ 선조 3)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퇴계로 이황이 제금나 살던 토계리를 따서 지은 것이다. 원래는 토계이던 것을 이황이 퇴계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퇴계의 할아버지는 태어나는 아이한테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려고 당시에는 일반화되지 않았던 온돌방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게 하는 특별한 배려를 했으며 그래서 퇴계라는 석학이 자라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퇴계는 12세에 숙부에게서『논어』를 배웠는데, 성품이 엄격하여 자식을 칭찬하는 일이 없었던 숙부도 퇴계에 대해서만은 집안을 빛낼 아이라고 늘 칭찬했다고 한다. 14세경부터는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였고, 20세경에는 주엽에 심취하여 위장병을 얻을 만큼 공부에 열중하였다. 2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 39세에 홍문과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과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이 때 풍기 군수 시절에 백운동서원이 국가의 공식승인을 얻은 교육기관으로 자리잡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그것은 서원을 통한 향촌사뢰 운동이자 사림세력 기반 확립의 시발이 되었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57세에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하여 61세에 완성하니 전국에서 학문을 연마하려는 제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하여 제자를 360여명이나 길러냈다. 67세 때 명나라 신제의 사절이 오게 되면서,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을 간절히 바라 그도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이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였고, 그는 사퇴하였지만 여러차례의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하였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여러 책을 진강(임금 앞에서 글을 강론함)하였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을 간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에 우환이 악화되어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키고,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퇴계는 학문을 닦는 과정에서 26세 연하인 고봉 기대승과 8년동안 사단칠정을 두고 논쟁을 벌여 끝에 기대승의 설을 받아들여 자기의 설을 수정하여 사단은 이가 발현하고 기가 따르는 것이며 칠정은 기가 발현하고 이가 거기에 오르는 것이라고 정리하는 겸허함도 보였다. 퇴계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인 퇴계학파를 형성해왔고, 일본 유학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에서 도의철학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한 학자는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 뿐이다.”라는 말로 퇴계를 극친했다. 퇴계가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유림에서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퇴계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에는 260여인에 이르렀고,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특히 이익은 성인(聖人)의 친호를 붙였고, 정약용은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에도 시대에 그의 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유학의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인들은 이황을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고, 그밖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찬양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 및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 재검토되고 있다. 계간학술지『퇴계학보』는 1990년 3월 64집에 이르렀다. 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될 만큼 관심이 크다. 이 밖에도 미국, 독일, 홍콩 등지에서 퇴계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퇴계는 스스로 도산서원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의 단암서원, 괴산의 화암서원, 예안의 도산서원등 전국의 수 십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퇴계의 저서로는『주자서절요』,『성학십도』,『퇴계전서』등이 있고, 시조에 『도산십이고』,『매화음주시』등 2천여수가 있다. 그리고 글씨에 『퇴계필적』이 있다.
도산서원에서 배출된 인물
퇴계(退溪) 이황(李滉, 연산군7년~선조3년:1501~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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