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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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화원
어화원은 중국 북경의 자금성 내 내중로(中路)에 위치한 정원이다. 자금성의 중심축에 있으며, 곤녕궁(坤) 뒤쪽에 있다. 명대(明代)에는 “궁후원(后苑)”라고 하였다가, 청대(淸代)에 어화원으로 개칭하였다. 1420년에 조성되었고, 기본 구조를 유지하면서 여러 차례 증축을 하였다. 규모는 남북의 길이가 80m, 동서의 폭이 140m, 대지면적은 12,000㎡이다. 원내의 중심 건축물인 흠안전(安殿)을 중심으로 하여 전방과 양쪽에 정자와 누각이 늘어서 있다. 이곳에는 소나무와 측백나무,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이 책에서는 어화원의 한 건물을 황제가 저자인 존 스터에게 건물하나를 내어주고 존 스터는 그 건물에서 매일 책을 읽고 황제를 만나면서 아주 자유롭게 이용한다. 먼저 어화원에 들어가기 전에 건복궁이 완전히 파괴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황제는 조금의 변화를 보여준다. 어화원은 황실 정원으로써 쾌적한 곳이었지만, 좁은데다가 바위 더미와 누각과 고목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 운동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없었다. 그리하여 건복궁의 파괴된 자리에서 황제는 다양한 야외오락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는 환관들을 추방한 뒤, 궁중의 다른 개혁들도 철저하게 단행하려 했지만, 내무부에게 번번이 방해를 받아왔다. 그래서 황제는 개혁추진을 위하여 만주인 가운데는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고 한인들 중에 개혁의 주도 인물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주도 인물들은 지난 1.2 년간 남서방의 명예직을 이미 맡고 있었다. 이들은 한인이지만 여전히 왕조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는데 그 인물들은 나진옥, 왕국유, 정효서였다.
특히 정효서 [鄭孝胥(정효서), 1860~1938] 중국 청말(淸末)의 관료, 학자 겸 문인. 청나라의 주일(駐日)공사관원을 거쳐 신호[神戶]영사를 지냈고, 한구[漢口] 철로총판(鐵路總辦), 호남[湖南] 포정사(布政使) 등을 역임했다. 일본이 만주국을 만들 때 선통제와 함께 참여해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는 저자가 여러 차례 이미 만났으며, 중국에서 생활한 25년 동안, 정효서보다 존경하고 칭찬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정요서는 다른 많은 보황파 중국 청나라 말기 입헌운동(立憲運動) 때 강유위[康有爲]양계초[梁啓超] 등 입헌군주정을 주장한 단체
인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공화국이 수립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문학과 서예에 몰두했다. 또한 처음부터 혁명에 반대했는데, 그것은 단지 군주에 대한 충성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족 애국자로서 혁명은 중국에 치명적인 실수이자 재난이라고 진지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1912년 황제가 퇴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그가 쓴 시에는 우울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그 예언은 대란종차시(大亂從此始), 즉 ‘큰 혼란이 이 사전에서 시작될 것이다’는 말로 풀이 될 수 있다.
존 스터가 정효서를 처음 만난 것은 1923년이었다. 당시 그의 목적이 부를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얻고자 하면 중국에서 최고의 부호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공화국 아래서 관직을 맡는 것은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내무부 개혁 사업에 도움을 구한 황제의 명령에는 순순히 따랐다. 그는 한인 출신으로 최초로 내무부의 수장이 되었다. 명목상 소영과 공동으로 그 직위를 맡았지만 이는 체면을 고려 한 것뿐이었다. 임명되고 며칠이 지나 황실의 한 몽골 황족이 베푼 오찬에 갔다 온 뒤, 협박장을 받았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또한 정효서를 공포와 증오의 대상으로 보던 내무부 관리들, 권세를 가진 만주 황족들 그리고 공화국 내각 안의 유력한 파벌이 동맹을 결성한 것이었다. 내무부는 우격다짐으로 자신들의 새로운 수장을 사직시키려 했는데, 이미 정효서의 명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이 일은 그렇게 크게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오히려 정효서의 내정개혁이 성과를 이미 거두고 있었다. 그는 궁전의 경비를 달마다 수천 달러씩 삭감했다. 만약 방해를 받지 않았다면 상당히 짧은 기간에 수지 균형을 맞춘 예산안을 황제에게 틀림없이 제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존 스터는 황제에게 어화원 내의 한 건물을 선물 받았다고 말했다. 황실 정원의 건물을 받은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이는 황제와 존 스터의 관계가 사제지간이라기보다는 단짝 친구로 여겼기 때문이다. 양성재, 바로 황제가 선물한 건물의 이름이다. 양성재는 자금성 최북단의 중앙부, 건청궁과 곤녕궁 뒤에 위치하거 있다. 이곳은 무수한 암석, 동굴, 고목, 꾸불꾸불하게 난 좁은 길들이 있어서 매력과 아름다움이 넘치는 진기한 장소이다.
양성재는 그가 황제에게 하사 받았지만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이곳을 받아서 그는 개인적인 장소로 쓰고, 숙소로도 이용하였으며 그곳에서 하루 종일 독서를 하거나 글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에서는 황제가 딱딱한 격실을 차리지 않고 저자와 단둘이서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황제의 궁전인 양심전 명대(明代) 세종 때 세워졌고, 내정[廷]의 건청궁[乾] 서쪽에 있다. 청(淸) 초기에 순치제(順治帝)가 이곳에서 병사하였다. 옹정제(雍正帝)가 양심전에 기거하기 시작한 이후로 건륭제 때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와 증축을 하였다. 신하를 접견하고 정무(政務)를 처리하며 황제가 독서와 공부를 하는 등 거주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부이[溥]가 이곳을 나가기 전까지, 청대(淸代) 8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기거하였다.
에서 걸어서 겨우 2,3분 거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황제와 자주 식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임들은 모두 철저하게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황제는 그의 누각에 여러 방문객을 데려왔는데 그 중에 한명은 완강한 노(老) 보황파 인사인 고흥명이다. 황제는 사적으로 알현을 받기 위해 양심전은 고홍명 [辜鴻銘(고홍명), 1857~1928] 청나라 말기 중화민국 초기의 관리이자 학자로 장지동[張之洞] 밑에서 외국사무를 맡았고 외무부 좌승(左丞)을 지냈다. 신해혁명 후, 베이징대학 등에서 저술과 교육에 힘썼으며 일본에 초청되어 강의하기도 하였다.
을 불렀으며, 그 뒤에 점심을 하려고 어화원으로 데려왔다. 그 노인은 이런 영예를 입은 것에 거의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또한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이날의 일을 가장 영광으로 생각했다. 고홍명은 스코틀랜드에서 외국식 교육을 받아 외국인 친구도 많았지만, 대체로 서양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혁명 이후에는 서양인에 대한 증오가 점점 심해졌는데, 그것은 혁명이 일어난 것을 서양의 영향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의 정신과 전혀 맞지 않는 민주주의 사상을 중국에 들여온 것에 분개했다.
고흥명은 결코 일류 중국학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많은 중국인들 과 마찬가지로, 영어나 기타 외국어 및 여러 학문을 공부하느라 중국학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귀국한 이후에 그는 이 뒤처짐을 만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열렬한 유교 숭배 자였으며, 유교를 중국 문명을 발전시킬 가장 좋은 토대로 여겼다. 그런 자신의 동포들이 세계에서 가장 예의바른 국민이며 따라서 가장 문명화된 국민이라고 넌더리가 날 정도로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인은 그 바람직한 특성을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했으며 그의 친구들도 실제로는 너무 거만하고 무례했다. 그는 많은 면에서 훌륭하고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지만, 사라지고 있는 또는 이미 사라져버린 구중국의 잔영(殘影)이었으며 몇 차례 미관말직에 임명받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부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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