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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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작 가 소 개
♣도연명 [陶淵明, 365 ~ 427]
1. 도연명의 생애
중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은 자이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으며, 심양(尋陽)의 시상(柴桑:현재의 江西省 九江의 서남쪽)에서 태어났다. 문 앞에 버드나무 5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방의 토착 사족(士族)으로, 북조로부터 내려온 귀족이 절대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의 남조 사회에서는 영달의 길에서 소외된 압박받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도연명이 평생 동경했던 증조부 도간(陶侃:259~334)은 동진 초에 장사군공(長沙郡公)대사마(大司馬:최고군사령관)까지 승진했고, 할아버지 도무(陶茂)도 무창(武昌)의 태수(太守)로 재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장사(長史)였던 맹가(孟嘉)의 넷째 딸이었다.
그의 생애는 대체로 세 단계로 나뉜다. 첫째시기는 29세 이전으로 면학과 농사를 지으며 살았을 때이다. 둘째시기는 29세에서 41세까지로 그가 여러 차례 벼슬에 나갔다가 이내 그만두고 은퇴했던 가장 착잡하던 시기이다. 셋째시기는 42세에서 죽을 때 까지로 그가 철저히 은퇴의 삶을 살았던 시기이다.
첫째시기에 관하여는 별로 자세한 전기자료가 없으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다가 처자를 거느리고 살 길을 찾아 마침내 강주(江州)의 제주(祭酒) 벼슬을 했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도연명은 가난 속에서도 유가의 경전을 중심으로 공부만은 엸심히 하였던 것 같다. 그의 시문 속에는 젊었을 적의 공부와 포부를 알려주는 대목이 많이 보인다. 그는 유가에서 가르치는 인간본위 또는 현실긍정 정신을 학문을 통해 체득함으로써, 그것이 자기 신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바탕이 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시는 한두 편이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둘째시기에는 가난한 생활에 몰리던 끝에 벼슬살이를 시도하였다. 그는 이 13년 사이에 적어도 다섯 번이나 집을 나서서 관리로서의 생활을 보낸다. 강주(江州)의 제주(祭酒).진군(鎭軍).참군(參軍), 강주자사(江州刺史)의 참군(參軍) 등이 그가 거친 중요한 벼슬들이며, 최후로 팽택(彭澤)이란 고을의 영(令)이 되었다.
그러나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팽택 현령을 사임한 후 재차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이때의 사퇴 동기에 관해서 도연명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임해서 어느 정도 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벼가 익거든 빠져나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누이의 부음이 들려오자 조금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귀전원거오수〉 이다.
셋째시기에는 도연명이 전원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자기 면모를 발휘하며 살았던 시기이다. 그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속세의 번거로움으로부터 벗어난 기쁨을 되풀이하여 노래하면서 술과 시로 여생을 보냈다. 그에게 있어서 전원과 술은 인간 본래의 세계에 자신을 안겨주는 길잡이였고, 시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는 수단이었다. 이후 도연명은 죽을 때까지 20여 년 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그는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주도인 심양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남촌(南村:또는 南里)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사한 후 술을 좋아하던 그는 차츰 빈궁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王弘)을 비롯해서 은경인(殷景仁)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지식인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 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 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2. 도연명의 문학세계
도연명(陶淵明)은 중국 문학사에 있어서 전원생활을 주요 소재로 대량의 작품을 창작한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의 전원시(田園詩)는 자신의 전원생활과 이상을 소박한 필체로 담담하게 써 내려 갔다. 전원이란, 그에게 있어서는 더럽고 번거로운 세상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세계였다. 그 때문에 도연명은 흔히 중국 문학사상 ‘전원시’의 개척자라 칭송되고 있다. 전원은 부정과 싸움 같은 것으로 뒤얽혀 있는 어지러운 사회생활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가 관리생활을 하던 시절의 시들을 보면 집요하다 할 만큼 되풀이하여 자유롭고 아름다운 전원에의 동경을 읊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만년에 관리생활을 청산하고 전원으로 돌아와서는 전원생활의 기쁨에서 시작하여 전원 속에 융화된 인간을 추구하는데 모든 창작의 정열을 바치고 있다.
문장의 수사(修辭)를 중시하던 당시의 귀족적인 문학조류 속에서, 도연명처럼 개인의 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성실히 인간의 순수한 본연을 추구했다는 것은 파격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도연명은 중국 문학사상 후인들의 한적시(閒適詩)나 자연시(自然詩)를 위하여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은 대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도연명의 시는 문장 면에 있어서도 그 시대에 있어서는 예외라 할 만큼 평이(平易)하다. 다른 그 시대의 시인처럼 아름다운 묘구와 대구, 또는 전고의 사용 등으로 화려하게 표현하는데 힘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와 생각하는 그대로를 표현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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