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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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당송팔대가
당송 팔대가라고 하면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고문의 대가 여덟 명을 말한다.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구양수(歐陽脩), 왕안석(王安石), 증공(曾鞏),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까지 여덟 명을 말한다.
한유는768년 출생하여 824년에 사망하였고 자(字)는 퇴지(退之). 한문공(韓文公)이라고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性理學)의 원조이다. 중국 당나라에서 문학과, 철학이 주된 분야였다. 송 대 이후 성리학의 선구자였던 중국 당나라의 문학가 겸 사상가로서 산문의 문체개혁과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하는 등 문학상의 공적을 세웠다. 고문은 송 대 이후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졌다. 또한,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제재의 확장과 더불어 송 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 대 이후 성리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유종원은 773년 출생하여 819년에 사망하였으며 자 자후(子厚). 장안(長安) 출생.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중국 당나라 시대 문학에서 능통한 사람 이였다. 관직에 있을 때, 한유와 친교를 맺는 사이였고 혁신적 진보론자로서 왕숙문의 신정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한 결과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문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이었다. 한유가 전통주의인 데 반하여, 유종원은 유·도·불을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천설(天說), 비국어(非國語), 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 우언의 형식을 취한 풍자문과 산수를 묘사한 산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그 자구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성과 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시는 산수의 시를 특히 잘하여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송별시 ·우언시(寓言詩)에도 뛰어나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유·유종원은 육조 이후 산문의 내용이 공소(空疎)하며 화려한 사륙변려체(四六騈驪體)의 문장인 데 대하여, 진한(秦漢)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 유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간결하며 뜻의 전달을 지향하는 새로운 산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고문운동(古文運動)이다. 이 운동은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점차 기세가 약해졌다.
구양수는 1007년 출생하여 1072년에 사망하였고, 정치와 학문, 예술에서 뛰어난 인재였다.
중국 송나라의 정치가 겸 문인. 한림원학사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가 되었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 와 시문인 서곤체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당송8대가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에는 <구양문충공집>등이 있다. 시 로는 매요신(梅堯臣)과 겨루었고, 문(文)으로는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송 대의 고문(古文)의 위치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이기도 하며, 오대사령관전지서(五代史伶官傳之序)를 비롯하여 많은 명문을 남겼다.
왕안석은 중국 송나라시대 960년에 태어나 1279년 생을 마감하였으며, 문필가이자 정치인으로 자(字)는 개보(介甫), 호(號)는 반산(半山)이다. 문필가이자 시인으로서 그는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북송의 6대 황제인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에게 발탁되어 1069~1076년에 신법)이라고 불리는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시역법(市易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의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개혁적 정치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재를 인정받았으며, 유가 경전뿐 아니라 제자백가의 서적에서 의서, 소설까지 다양한 서적들을 읽으며 기존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하였다.
인종(仁宗, 재위 1022~1063) 때인 1042년 과거에 합격하여 섬서회남절도판관(陝西淮南節度判官)으로 관직을 시작한 뒤 20년 정도를 화남(華南) 지방에서 각급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관개 사업과 재정 관리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널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학문과 행정 능력을 갖춘 유능한 인재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중앙 관직으로의 진출을 추천 받기도 하였지만, 왕안석은 집안 사정의 어려움을 내세워 사양하였다.
1058년에 왕안석은 인종(仁宗)에게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서술한 <만언서(萬言書)>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고 <주례(周禮)>를 전범으로 한 개혁의 추진을 주장하며 인재 양성과 선발, 이재(理財) 방법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만언서>는 그의 개혁 정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문장에서도 모범이 되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열아홉의 나이로 황위(皇位)에 오른 신종(神宗)은 정치의 쇄신과 개혁을 추진하며 왕안석을 등용하였다. 신종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왕안석을 강녕부(江寧府) 지사(知事)로 임명하고, 곧바로 중앙으로 불러 한림학사로 삼았다. 그리고 1069년에는 그를 참지정사로 임명하여 신법(新法)을 입안하여 개혁 정책을 실행케 하였다. 왕안석은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설치하여 신법(新法)을 추진하였으며, 1070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재상(宰相)으로서 국정 전반을 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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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문] 고사성어 모음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사람인데 그에게는 최군(崔群)이라는 인품이 훌륭한 벗이 있었다. 한유는 외직(外職)에 있는 그 벗의 인품을 기리며 〈최군에게 주는 글與崔群書〉을 써 보냈는데 명문(名文)으로 유명한 그 글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사람들이 저마다 좋고 싫은 감정이 있을 터인데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모두 자네를 흠모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봉황(鳳凰)과 지초芝草:영지(靈芝)가 상서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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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사람인데 그에게는 최군(崔群)이라는 인품이 훌륭한 벗이 있었다. 한유는 외직(外職)에 있는 그 벗의 인품을 기리며 〈최군에게 주는 글與崔群書〉을 써 보냈는데 명문(名文)으로 유명한 그 글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사람들이 저마다 좋고 싫은 감정이 있을 터인데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모두 자네를 흠모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봉황(鳳凰)과 지초芝草:영지(靈芝)가 상서로운

  • [교양] 한자어의 이해
  • 당송(唐宋) 팔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는 당나라에서 성행했던 이른바 병문(騈文), 내용 없이 수식만 일삼던 문장을 타파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때문에 그의 문장은 맹자(孟子)에 버금갈 정도라고 했다. 중국의 고금(古今)을 통해서도 손꼽히는 명문장가로「한유가 육경의 글로써 모든 학자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음에 그의 학문이 성행하여 배우는 자들이 그를 우러러보며 태산북두와 같다고 말했다.(愈가 以六經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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