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하이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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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실전고급거시경제학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연혁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CH, 1899년 5월 8일~1992년 3월 23일)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이다.
그는 1938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그는 화폐적 경기론과 중립적 화폐론을 전개하였고,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계획경제에 반대하였다. 사회주의 및 전체주의 그리고 좌익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고, 또한 서구의 복지국가가 채택하고 있던 케인스의 이론에 대항하여 자유 민주주의 이론과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옹호하였고,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경제학이 그의 주된 연구 영역이지만, 그는 경제학에만 머무르지 않고 정치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폭넓은 연구 활동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서구 복지국가가 복지병과 경기침체 현상을 안게 되면서 자유시장 중시와 계획경제 비판을 요체로 한 그의 이론이 재조명되었고,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을 필두로 하는 신자유주의 출현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1974년 화폐와 경제 변동에 관한 그의 연구로, 이데올로기적 라이벌인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과 더불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1991년에는 미국 대통령 자유 메달(U.S.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대표적 저서로는 《법, 입법, 자유》, 《노예의 길》(예종에의 길) 등이 있다
※하이에크에 대해서
케인스를 얘기할 때, 케인스의 숙명의 라이벌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1992)를 빼놓을 수 없다. 많은 지식인이 좌익으로 흐른 20세기 전반에 의연하게 자기의 신념을 지켜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경제학자가 하이에크이다. 하이에크는 슘페터와 같이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양부모 모두 오스트리아 귀족가문 출신의 유력한 집안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런던정치경제대학에 채용되고 18년간 영국에서 살다가 1938년 영국 시민이 되었고 1950년 시카고대학, 1962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 1968년 잘츠부르크대학의 교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경기순환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화폐의 중립화’를 주장하고 그것을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는 케인스의 수요관리정책에 반대하였다.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1944년의 《노예에의 길(The road to serfdom)》에서 통렬하게 사회주의를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그저 그런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하이에크가 1950년부터 살게 된 미국에서 나중에 출판되었을 때는 더 큰 호응을 얻었다. 개인의 자유는 시장기구의 작용에 의해서 보증되는 것이고 그것을 제거하면 자유를 잃게 된다.”
세계 경제학계의 대가들, 예를 들어 미국의 피셔(Irving Fisher)나 영국의 힉스(John R. Hicks), 케인스(John M. Keynes) 등이 1920년대의 호황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을 당시인 1928년, 하이에크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근거로 미국의 불황이 임박했다고 예언했으며, 1929년 《화폐이론과 경기순환》을 써서 갑작스런 신용증가가 재화 간의 상대가격을 어떻게 변화시키며 결국 지속할 수 없는 과잉투자를 낳게 되는가를 보여주었다. 그 당시 공교롭게도 이 책이 나온 직후 뉴욕의 주가가 폭락하고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각각이 제시한 공황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정반대였다. 대공황 당시에 하이에크는 케인스에 비해 하이에크는 신참내기 경제학자였다. 케인스는 침체의 원인이 ‘과소투자와 과소소비’라 했고, 하이에크는 ‘과잉투자와 과잉소비’라고 했다. 하지만, 세상은 단기적 임기응변에 능했던 유쾌한 케인스를 선호한 반면, 이론적 일관성을 장기적 안목에서 추구했던 하이에크는 1960년대 사회주의적 복지정책과 국가개입주의가 세계를 풍미하면서 무시되거나 공개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옥스퍼드의 철학자 앤서니 퀸튼(A. Quinton)은 하이에크를 ‘거대한 공룡’으로 묘사했으며, 20세기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 통하는 에릭 홉스봄(Eric John Ernest Hobsbawm, 1917~2012)은“하이에크가 황야 속의 예언자를 자처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말년에 청력 저하와 학계에서의 비난은 하이에크의 우울증을 악화시켰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모든 계획경제에 반대하였다. 필생의 대작으로 불리는 《법, 입법, 자유》를 저술하였으며 스웨덴 학술원은 ‘경기순환론과 화폐정책 및 신용정책의 효과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1974년 스웨덴의 K.G.뮈르달과 함께 하이에크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수여했다.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로 표류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경고가 너무 비 대중적이어서 자신이 그 상을 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하이에크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상을 통해 명성을 얻는 것에는 큰 장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갑자기 당신의 얘기를 경청하게 된다는 점이다” 하이에크의 노벨상 수상 이후 케인스이론이 몰락하면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노벨상을 휩쓸게 되었으며, 몽페를랭 협회 회원 중에서 일곱 명이나 노벨경제학상을 받게 된다. 몽페를랑 협회는 자유로운 사회의 존속을 보장할 수 있는 원칙들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관심사가 비슷한 학자들의 국제적인 모임을 결성할 것을 제안하여 1947년 스위스의 제네바호수 부근에 있는 몽페를랭에서 10개국 39명의 자유주의자들이 모여 만든 모임을 말한다. 학계에서의 반전에 이어 현실 정치에서도 하이에크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정치인이 성공을 거두었다.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을 읽고 감명을 받은 바 있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보수당 당수로 선임되고 몇 달 후인 1975년 여름 보수당 조사부가 주최한 ‘중도주의’에 대한 강연에 초청된 자리에서 가방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쾅 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1989년 하이에크의 90세 생일에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당신의 작업과 사상이 우리에게 준 지도력과 영감은 절대적으로 결정적이었으며, 우리는 당신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1991년 “이후 세대들은,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경이감과 외경심을 가지고 그의 저작을 읽을 것”이라면서 하이에크에게 “대통령 자유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대영제국 명예훈장(Companion of Honor)”을 수여했고 1982년 독일 연방공화국은 “과학 및 예술 훈장”을 수여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우린 모두 죽는다”라는 말을 남긴 유쾌한 케인스가 비교적 젊은 나이인 65세인 1946년 숨을 거두지만, 하이에크는 사회주의 근본을 해체한 마지막 저서 《치명적 자만(fatal conceit)》(1988)이 발간된 지 1년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저작이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공산주의 모국에서 출판되는 것도 지켜보면서 1992년 93세의 나이로 통일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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