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 팔대가 그들은 누구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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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송팔대가 그들은 누구인가 ? ]
<< 당송팔대가 그들은 누구인가? >>
당송팔대가란 문장, 산문으로 이름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며, 당나라 때 문인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 그리고 송나라 때의 문인 구양수(歐陽脩),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증공(曾鞏) 그리고 왕안석(王安石) 이 여덟 명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여덟 명의 공통적인 문학적 중요성을 살펴보면 그들은 알기 쉽고 유익한 글로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학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점이다. 당송 이전의 문학들은 화려함과 격식에 집착하여 실질적인 내용이 없었다. 그들은 고문을 통해 이러한 그릇된 풍조를 고치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한유와 유종원은 겉만 화려하며 속이 빈 문장들을 비난하며 유교적 정신과 도의 실천을 바탕으로, 뜻의 전달을 가장 큰 목적으로 하는 산문운동을 전개하는 데 이를 고문운동이라고 한다. 그 뒤로부터 구양수가 한유의 문집을 규범으로 하여 알기 쉽고 교훈 담긴 산문을 만드는 혁신운동에 앞서 활동하며 이 운동으로부터 소순, 소식, 소철, 증공, 왕안석 같은 훌륭한 문인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의 고문운동은 중국 산문의 발전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지금부터 당송팔대가의 문인 한 사람씩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한유 (韓愈) [768년~824년]
한유의 간단한 생애를 살펴보면 36세 때에 감찰어사가 되어 장안의 장관이었던 경조윤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양산현의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817년 50세 때 지방 군벌인 오원제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이 되었다가, 819년 현종이 불골(부처의 유골)을 궁중으로 맞아 맞아들이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는 표를 올렸다. 이에 노여움을 사서 사형을 겨우 면하고 조주 사사로 좌천당한다. 이듬해 현종이 죽고 다시 조정으로 되돌아가서 관계 세력을 넓혀 관리 임면을 관장하는 이부시랑에 까지 올랐다가 57세에 병으로 죽는다. 그의 생애를 보면 그는 단순한 문인이 아닌 정치가이자 사상가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한유의 문학적 최대 공로는 산문체계의 개혁을 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대구(對句)와 음조(音調)를 중히 여기는 겉만 화려한 변문을 반대하고 고문을 주장하였다. 그의 고문을 따른 산문은 송대 이후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되었고, 이성적이며 감정을 억제한 그의 문장은 중화민국 시대에 일상용어와 일치하는 백화가 등장하여 쓰이기 시작하기 전까지 중국 산문문장의 본보기가 되었다.
사상분야 측면으로 보면 그는 유교를 중심으로 하며 공자의 유교, 유가적 사상을 본받고자 하였다. 그래서 불교와 도교를 맹렬히 비난하며, 봉건적인 일상윤리와 사회질서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의 주요 논문 중에는 <원도>가 있다. 내용은 원도의 도는 유가의 인의의 도를 말한다. 그의 고문운동이 이 유가의 도를 발전시키려는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원도를 통해 한유는 유가의 도가 인류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사상임을 밝히고 불교와 도가의 도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구분 짓고 잇다. 이를 통해 특히나 불교와 도가를 배척하는 한유의 유학이론의 특색을 살펴 볼 수 있다.
유종원 (柳宗元) [ 773년~819년]
유종원은 진사시험을 거쳐 33세에 상서예부원외랑이 되었다. 그 해 덕종이 죽고 순종이 즉위하자 완숙문, 왕비등과 환관이나 귀족 세력을 누르고 쇄신을 꾀하려는 정치 개혁운동에 참가했다. 하지만 개혁 운동은 실패하고 유종원은 영주사마로 좌천되었다. 그 이후로는 다시는 중앙에 돌아오지 못하고 43세 때 유주자사로 옮겨져 47세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종원이 좌절과 13년에 걸친 변방의 생활은 오히려 그의 사상과 문학이 더욱 심화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 고문의 대가로서 문학적인 견해는 한유와 비슷하나 그들의 사상적 입장은 완전히 대립적이었다. 한유의 도는 유가의 윤리적인 관점에 입각한 교화의 도라는 것과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는 것에 비해 유종원의 도는 불교, 도교 및 문예 기교의 도를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즉 유종원 한유에 비해 유,불,도를 모두를 인정하며 자유와 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설> <봉건론>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천설>을 간단히 살펴보면 총 2편으로 되어있는데 한편은 한유의 “언천지설”로 하늘의 의지가 있어 사람이 원기음양을 무너뜨림이 심하면 하늘의 벌을 받는다고 보았다. 그 다음편이 유종원이 “언천지설”에 대한 반박을 하는 부분이다. 하늘과 땅은 원기가 아무리 대단해도 물질이기 때문에 인격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한유에 반박을 하며 “원기일원론”을 주장하고 하늘에 의해 벌을 받는 다는 것에 대해서도 심히 부정을 하였다. 여기서 둘의 사상적 차이를 볼 수 있다. <봉건론>에서 그는 주대의 봉분제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는 주대의 국토를 봉하고 제후를 세우는 봉분제에 비판 가졌던 걸로 보아 굉장히 합리주의자이었음을 볼 수 있다.
구양수 (歐陽脩) [1007년~1072년]
구양수의 생애를 잠시 살펴보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4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뒷바라지로 공부하였다. 문구(文具)를 살 돈이 없어 어머니가 모래위에 글을 써서 글을 가르쳤을 정도였다고 한다. 10세 때에 한유의 전집을 읽은 것이 문학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되었다. 24살 때 진사가 되어, 추밀부사, 참지정사, 형부상서, 병부상서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은퇴 다음해에 은둔 생활을 하다가 영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66세의 나이로 천명을 다했고 2년 뒤 조정에서 문충(文忠) 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 시호는 그가 일생동안 이룬 문학적 위업의 저력을 볼 수 있는 가장 큰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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