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시인 오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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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시인 오장환
목차
Ⅰ.문학과 사회의 관계
Ⅱ.오장환의 시적경향
Ⅲ.시대에 따른 시적변화
ⅰ. 30.40년대 시대적 배경
ⅱ. 해방 전과 해방 후 시적 변화
1) 해방 전
1-1)유교관습에 대한 부정의식 - 성씨보
1-2)고향발견과 현실의식 - 고향 앞에서, 귀향의 노래
2) 해방 후
2-1 해방공간의 환희 - 병든 서울
2-2 좌경적 이념과 사회주의 사상 - 깽
Ⅳ.귀촉도
ⅰ. 작품 귀촉도 소개
ⅱ. 서정주와 오장환
1)서정주와 오장환의 차이
2) 오장환의 저항
Ⅴ.결론(+조원의견)
참고문헌
서론
김기림은 오장환을 일컬어 “길거리에 버려진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도 바다의 파도소리를 듣는 아름다운 환상과 직관의 시인”이라 하였다. 오장환의 시적재능이 뛰어남을 이름일 것이다. 사실 오장환은 조숙하고 재능 있는 시인임에 틀림없다.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첫 시집 <성벽>을 냈는가 하면, 삼십도 채 되기 전 <헌사> <나사는 곳> <병든 서울> 등의 창작시집과 역시집 <에세-닌 시집>을 출간한 것이다. 그는 오직 시밖에 모르고 시 쓰는 것을 천직으로 알았다. 그는 1936년 서정주,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시작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그리하여 이듬 해 첫 시집 성벽이 간행되면서 시단에서 크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의 시작활동 일체가 금기되어 왔기에 전혀 그 가치를 논의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늘 뒷전에 묻혀 있다가 1988년 단행된 일련의 해금조치로 납 월북 문인들의 대부분이 해금됨으로써 그 연구가 펼쳐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장환의 시세계를 통시적으로 살피되, 오장환의 삶의 궤적에 따라 발표하겠다.
Ⅰ.문학과 사회의 관계
문학은 사회현상의 하나이다. 사회생활 속에서 만들어지며 그만큼 사회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을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활동으로 이해한다면, 그 활동의 주체는 말할 나위 없이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직업적인 문학인이건 문인을 지망하는 아마추어이건 상관없이 그는 사회의 일 구성원이며, 따라서 사회 속에서, 사회적인 관계와 생활의 과정 속에서, 문학을 생활의 일부로 삼고 있다. 그는 왜 문학을 하는가. 생계 문제를 제쳐놓고 본다면, 그것은 자신의 느낌이나 의사를 표현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공감을 사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회에 대한 자신 혹은 다른 이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그 사회의 표현 형식에 따라 표현하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정신적인 보람을 느끼거나 어떤 다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흥미나 느낌과 같은 정서적인 것들도 대개는 사회적인 공감대 속에 놓여 있으며, 작가가 창조해 낸 전혀 새로운 흥미나 느낌조차도 그것이 독자들에게 공감과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한, 새로운 공감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회적인 성격과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기존의 정서적인 공감대를 강화하고 재생산시키는 역할을, 후자의 경우는 공감대를 부분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롭게 형성해 나가는 역할을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문학과 사회의 관계는 일방통행적인 것이 아니다. 문학은 작가 자신이나 작가가 묘사하려는 인물들의 사회적 경험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사회를 반영하는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작가는 현실 경험을 있는 그대로 사진으로 찍어 내는 복사기는 아니다. 작품에는 작가의 독특한 개성과 상상력, 그리고 의도성이 투입되고, 현실과 현실 경험은 그만큼 ‘채색’ 또는 ‘가공’되기 때문이다.
본론
Ⅱ. 오장환의 시적경향 현대 시인의 연구 - 김학동 지음
첫째 오장환이 본격적인 시인으로 활동하기 전의 시적 경향이다. 비록 이들 작품이 오장환이 어릴 때 쓴 습작품이긴 하지만, 다분히 징후 성을 띠고 있다 하겠다. 다시 말해서 전통과 낡은 유습을 부정하는 진보사상이 중요한 주제의식의 하나라면, 그 징후적인 것이 습작품에 이미 배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전통의 거부반응과 퇴폐적 경향은 시집 <성벽>에서 잘 나타난다. 낡은 전통과 유습에서 벗어나 해항지대를 방랑하기도 하고 병적 관능과 퇴폐성에 빠져 들기도 한다. 이것은 보들레르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서 영향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셋째, 죽음의식과 고향회귀의 관념은 시집 <헌사>와 <나 사는 곳>의 시편들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오장환의 시상으로 보아 중간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성벽이후 8.15전까지의 작품들이 대상이 된 셈이다. 이 기시에 이르면 오장환의 관심은 의식의 황폐화와 죽음 및 묘지, 카인의 후예로서의 악마주의와 원죄의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로 요약된다. 이것은 그의 초기 시와의 연관선상에서 본 시적 변이양상이고, 민족적으로 처참했던 상황의식과 병자의식은 8.15이후의 <병든 서울>까지 연계되고 있는 것이 아닐 까 한다.
넷째, 해방공간의 환희와 좌경적 이념의 추구는 <나사는 곳>의 시편일부와 <병든 서울>의 시편과 관렴이 있다. 오장환은 좌경단체에 가담하여 분주한 활동을 하면서도 많은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었다. 8.15직후 격벽하는 혼란된 상황의식을 웅변적으로 토로한다. 이 시기에 오장환의 시작들은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먼저 나라를 되찾은 감격과 환희의 순간을 노래한 이를테면 그의 좌경적 사상이 형성되기 이전으로 민족공동체 의식을 노래했고, 그 뒤는 정국이 혼란되고 좌우이념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는 현실에 참여하여 좌경적 이념과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나온 것이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한국현대시의 공간과 전략 - 양혜경 지음
현대시인의 연구 - 김학동 지음
오장환 평전 - 김학동 지음
오장환 전집 - 오장환
협력과 저항 - 김재용 지음
네이버 백과사전
※ 참고 자료
** 오장환의 생애 오장환 전집 김학동 새 문사
1918.5.15 (1세)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아버지 오학근과 어머니 한학수 사이에서 4남 4녀 중 3남으로 태어남
1924.4.1 (7세)
회인공립보통학교 입학. 성적은 8/10점으로 양호한 편
1927.5.2 (10세)
안성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전학.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서리 314번지로 이사
1929.1.2 (12세)
큰어머니 이민석 사망(전처)
1930.3.24 (13세)
안성공립보통학교 졸업. 학업성적은 중위권. 중등학교 입학시험 낙방. 중동학교 속성과 입학
1931.4.1 (14세)
휘문 고등보통학교 입학. 한학수가 적실로 바뀌며 자녀들도 적출로 바뀜
1933 (16세)
2월~3월 수업료를 내지 못하여 정학처분. 11월 <조선 문학>에 시작품 <목욕간> 발표
1934.9 (17세)
<조선일보>에 연작시 <카메라룸> 발표
1935.1.26 (18세)
동경유학사유로 자퇴. 학적부를 보면 학년이 오를 때마다 성적과 출석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낙제점수를 받다가 자퇴한 것으로 보여 짐
1936 (19세)
3월 지산중학교 수료. 8월 29일 서울 종로구 운이정 24번지로 호적을 옮겨온다. 시인부락낭만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시작활동이 본격화된다.
1937 (20세)
4월 일본 명치대학 입학.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
8월 첫 시집 <토벽> 간행. 100부 한정본으로 자비 출판함.
전북 출신 황씨와 결혼하여 일년여를 살다가 헤어졌다고 하지만 서정주의 말뿐. 확실하지 않음
1938 (21세)
3월 명치대학 중퇴 후 귀국 / 7월 22일 아버지 오학근 사망
서울 종로구에서 남만서방 경영
1939.7 (22세)
두 번째 시집 <헌사> 발행
1941 (24세)
<귀촉도> <귀향의 노래> 등을 <문장>, <춘추> 등에 발표하다.
1942 (25세)
<병상일기> 등을 <춘추>지에 발표하다.
1945 (28세)
신장병으로 입원 중에 8.15 해방을 맞이하다.
시집 <병든 서울>의 시편들을 이 기점으로 쓰기 시작하다.
1946 (29세)
2월에 결성된 조선 문학가동맹에 참여하여 활동.
5월, 역시집 <에세-닌시집> 간행
7월, <병든 서울> 간행
1947 (30세)
2월 장정인과 결혼
6월, <나 사는 곳> 간행
12월, 본격적 국토분단을 전후로 월북
1948 (31세)
북조선문학예술 총동맹 기관지 <문학예술>에 발표된 <2월의 노래>발표.
1950 (33세)
5월 소련기행 시편을 수록한 <붉은 기> 출간
1951 (34세)
지병인 신장병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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