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국가경영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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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위인이 있고 수업도 세종대왕에 대한 이야기와 그 시대에 있었던 일을 다루는 것이 주였기에 사실은 집현전 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하였다. 성삼문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려고 하였으나 사실 성삼문 본인의 업적 보다는 집현전 학자들이 이룬 업적이 더 크게 부각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고 그들을 다 다루려면 사육신과 생육신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이를 언급하게 되면 수양대군의 집권 시에 있었던 일, 한명회의 이야기 등 이 보고서를 쓰는 입장에서 너무나 많은 욕심이 생길 것 같아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을 포기 하여야만 하였다. 따라서 개인으로서 조선시대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그 발자취가 뚜렷한 사람들 중 유명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다 보니 허준이라는 인물이 떠오르게 되었다. 물론 너무나도 유명한 이순신 장군이나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일일이 말로 다 설명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지만(아무래도 현재 우리나라의 마지막 왕조라서 그런지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어서 타 시대보다 인물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 하였기에 위인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아주 유명한 인물보단 좀더 우리 실생활에 아직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물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허준이라는 인물이 기준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허준이라는 인물은 일전에 드라마로도 제작 되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고, 세종대왕 시절에 편찬 되었던 언해구급방이라는, 지금의 응급처치법에 가까운 저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 하였기 때문에 세종대왕과의 약간의 연관성도 있으며, 이 보고서를 쓴 사람의 입장에서 한방의학이 현대 의학으로 쉽게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분을 해결해 주는 경험으로 미루어 나름대로의 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허준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되었다. 이 기회에 허준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이 위인이 조선시대에 어떠한 발자취를 남겼나에 대한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
2. 허준의 일생
허준은 1546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아버지 허론과 어머니 손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천 허씨의 시조인 허선문의 20세손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허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어릴 때 경상도 산청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준은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였고 당시 중인이나 서얼들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의 총명과 열성은 이미 20대에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게 했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서울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다.
허준이 내의원 취재에 등과한 것은 1574년(선조 7) 그의 나이 29세 때로 상당히 늦은 나이에 궁중의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내의원에 들어간 다음해부터 어의로 선임되어 안광익과 더불어 임금의 병을 진찰하고 효험이 있자 임금으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었다. 1578년 9월 내의원 첨정 으로 있을 때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을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았다. 1587년에는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는데 허준은 태의 양예수 · 안덕수 등과 더불어 녹피(鹿皮) 1영(令)을 하사 받았다. 1590년에는 허준이 왕자를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의 가자를 받았다. 그러자 정원 사헌부 사간원에서 일제히 나서서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을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가 신하들의 거듭된 요구를 물리쳤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살상되고 왕은 의주까지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허준은 선조의 건강을 돌보았다. 이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5년 왕이 별전편방에 나와 의관인 허준 등으로부터 침치료를 받는데 약방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 부제조 오억령 등이 입시했다. 1596년 동궁인 광해군의 병을 고친 공로로 허준은 가자 되고 김응탁 · 정예남은 승직되었다. 이에 허준은 그 벼슬이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즉시 간원들이 나서서 의관들의 가자를 개정할 것을 청했으나 선조가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여 듣지 않았다. 같은 해에 선조가 허준에게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하라고 일렀다. 허준이 유의 정작과 태의 양예수 · 김응택 · 이명원 · 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하고 책의 요점을 잡아가는 시점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다시 불러 허준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고 하면서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1600년 수의(내의원의 책임자) 양예수(지사:정2품)가 사망함에 따라 허준이 수의가 되었다. 1604년 임금이 호성공신의 교서를 발급하여 의관으로서는 허준과 이연록 두 사람을 3등에 책훈하고 허준은 양평군에 봉작 되었다. 1606년에는 임금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양평군 정1품 보국 숭록 대부로 승급했다. 이것은 벼슬로서는 최고의 품계인 만큼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수십 차례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선조도 결국 허준의 가자를 보류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는 일로 논의가 복잡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고 막아섰다. 1608년에 마침내 선조의 병세가 급박하다가 돌연히 사망했다. 선조의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광해군 즉위초부터 연일 계속되는 계청에 허준을 보호하던 광해군도 마침내 견디지 못하여 허준의 직책을 좌면하고 거처를 제한하는 벌을 내리도록 승인했다. 그러나 그 해가 가기 전에 허준에게 내린 벌을 해제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허준은〈동의보감〉의 저술에 노력하여 1610년(광해군 2) 마침내 완성했다. 이후 어의로 있다가 1615년 죽었다. 그의 사후 광해군은 생전에 보류되었던 보국승록대부를 추증했다.
이상이 허준의 일생에 관한 기록이다. 허준은 신분의 벽을 넘어서 자신의 실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나아가 위대한 저서를 여러 권 남기기에 이른다. 이 당시는 세종시대처럼 실력이 있으면 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는 아니었다. 장영실처럼 임금의 총애를 받아 관직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허준은 임금의 총애를 자신의 실력으로 얻어냄으로서 인정 받았고 이에 따라 많은 적을 두게 된다. 임금의 총애를 입어 다양한 저술을 하게 되고 이는 아직도 현대 한의학에 많은 영향을 기치게 된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그의 저술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3. 허준의 저서
허준이 오늘날까지 의성으로 추앙 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의학적 저술 때문이다. 종이와 인쇄시설이 극히 구하기 힘든 시기였으므로 임금의 지시가 아니면 책을 만들기 어려웠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든 허준의 저술은 왕명에 의한 것이다.
기록에 있는 허준의 저술은 1581년 5월에 나온 〈찬도방론맥결집성〉이라는 진찰서 4권이 최초이다. 환자를 진맥하는 기본을 알기 쉽게 쓴 책으로, 중국의 고양생이 쓴 〈찬도맥결〉이라는 책을 허준이 고쳐 쓴 것이다. 원서는 1권으로 되어 있는데 표현이 잘못된 곳이 많고 문장도 복잡하게 얽혀져 실제 임상에는 사용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이것을 허준이 고쳐쓰면서 문장을 짧고 쉽게 바꾸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4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허준이 쓴 책은 동의고전 중의 하나인 〈두창집요〉로, 두창(천연두)에 관한 책으로는 임원준이 1460년에 편찬한 〈창진집〉이 있고 이것을 1518년 우리말로 번역한 〈언해창진방〉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유실되어 두창 치료에 관한 참고서가 없었다. 두창의 원인과 치료법을 모르게 되어 자연히 미신적 측면으로 흘러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다. 나라에서는 두창에 관한 책의 편찬을 허준에게 위임했다. 허준은 자신의 오랜 기간의 치료경험과 〈의학입문〉·〈고금의감〉·〈득효방〉·〈만병회춘〉, 전씨의 〈소아직결〉 등을 참고하여 1년 만에 〈두창집요>를 편찬했다. 이 책의 상권에는 두창의 원인·예방·증상이 서술되어 있고, 하권 뒷부분에는 임신부의 두창과 반진에 대한 내용이 씌어 있다. 이 책은 출간 전후 두창 치료의 참고서로 널리 이용되었는데 당시 사회발전의 한계로 말미암아 비과학적·비위생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은 1601년에 편찬되었고, 1608년 내의원에서 목판본으로 출판했다.
〈언해두창집요〉는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백성들이 사용하기 쉽게 만든 책이다. 〈언해태산집요〉 역시 1608년에 허준이 왕명을 받아 찬술한 부인과에 속하는 태산과 태아보호에 관한 의서로 1책으로 되어 있고 각 항목마다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은 총 81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기술이 정연하고 산과에 관해서는 빠짐없이 간결하게 씌어 있다. 이 책의 인용서는 〈의학입문〉·〈의학정전〉·〈소문〉·〈맥경〉·〈고금의감〉·〈부인대전〉·〈종행선방〉·〈본사방〉·〈득효방〉 등이다. <언해구급방〉은 조선시대 세종의 명을 받아서 편찬한 구급방을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아 우리말로 옮겨 1607년 내의원에서 간행한 책으로 상하 2책으로 되어 있다. 〈동의보감〉은 허준이 1596년 왕명을 받아 편찬을 시작한 책으로 시작한 지 15년 만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되었다. 우리나라의 의학전통은 모두 〈동의보감〉으로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동의보감〉에서 흘러나갔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의서이다. 〈동의보감〉은 기존의 의학전통을 집약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의학전통의 원천이 되었다. 18~19세기에 나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의서인 주명신의 〈의문보감〉, 강명길의 〈제중신편〉, 황도연의 〈의종손익〉 등은 〈동의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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