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금속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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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는 대한민국 금속공예가로서 우리나라 금속공예사에 관심이 많다. 세계 최고의 IT기술과 디지털 기술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저력은 수천 년을 이어온 공예정신에서 나왔다. 지구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청자의 푸름과 백자의 순결함, 세상을 울리는 동종소리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정교한 은입사기법은 유일무이한 우리 것이다.
그 중 우리의 범종은 그 존재는 흔하나 우리나라만큼 정교하면서 과학적이고 예술적인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이번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 조선시대 범종에 관해 알아보려한다.
범종이란 절에서 시간을 아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또는 의식을 행하고자 할 때 쓰이는 종을 말한다. 길게 울려 퍼지는 범종의 장엄하고도 청명한 소리는 듣는 사람들이 세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주며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참외토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나가 이 범종의 소리를 들으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는 중생들 까지 구제 받을 수 있어 다시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기에, 범종은 일찍부터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불교 의식 법구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삼국시대의 불교전래이후부터 사용되었다고 생각되지만 현재남아 있는 것을 통일 신라 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종뿐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범종은 외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울림소리가 웅장하여 동양권의 종 가운데서 가장 으뜸으로 꼽힌다. 바깥모양은 마치 항아리를 거꾸로 엎어 놓은 것 같이 위가 좁고 배 부분이 불룩하다가 다시 아래쪽인 종구 부분으로 가면서 점차 오므라든 모습이다. 종의 꼭대기 부분에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리고 입을 벌려 마치 종을 물어 오리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을 용뉴라고 부르는데,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의 역할을 한 것이다. 용뉴의 목 뒤 부분에는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볼 수 있는 대롱형태의 기다란 관이 부탁되어 있으며 이것을 용통 또는 음통음관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용통은 속이 비어 있고 많은 수의 범종이 이 음통 아래쪽에 작은 구멍을 내어 종의 몸체 안쪽으로 뚫리도록 한점으로 미루어 종을 쳤을 때 울림소리에 어떠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음향조절 장치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음통 가운데 일부는 그 안이 막혀있거나 종소리에 큰 관계가 없는 작은 종에까지 부탁된 점으로 미루어 나중에는 용뉴와 함께 그 의미만이 강조되는 장식물로 변화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종의 몸체 위부분과 종구 쪽의 아랫부분에는 같은 크기의 문양 띠를 만들었다. 이것을 각각 상대와 하대라 부르며 이곳에는 당초무늬, 보상화무늬, 연꽃무늬 등의 식물 문양을 장식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간혹 비천이나 번개무늬 같은 문양을 장식하기도 한다. 또한 상대 바로 아래 네 방향으로는 사다리꼴의 연곽 대를 만들고 각각의 연곽 안에 3x3열로 배열된 아홉 개씩의 돌기장식이 배치되었다. 이 장식을 중국 종이나 일본종과달리 연꽃이 피어나기 직전의 봉오리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종을 티는 자리로서 별로로 마련된 원형의 당좌가 종신 앞뒤면 두 곳에 돌출 장식되어 있는데, 이부분의 위치는 몸체의 약 사분의 일 정도인 종의 외형상 가장 불룩하게 솟아오른 자리게 마련하였다. 이 당좌와 당좌 사이의 빈 공간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이나 비천상을 조각하는 것도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은 통일 신라 725년에 제작된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종이다. 이종은 통일신라 종의 전형양식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용뉴의 용머리가 크고 입을 벌려 종을 물어 올리는 형태이다. 연곽 안에 표현된 아홉 개씩의 연꽃봉오리는 높게 돌출된 매우 사실적인 모습이며 몸체에는 한 쌍의 주악상이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에서 날아 내리는 모습을 흩날리는 천의와 함께 아름답게 조각하였다.
높이가 3.6m에 이르는 성적대왕신종은 원래 봉덕사에 있던 종로 우리에게 에밀레종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하다. 종에 새겨진 1,000여 자의 명문에 의하면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래 제작코자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다음대인 혜공왕7년(771년)에 이르러서야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종은 명문에 기록된 간절한 염원의 내용을 반영하듯 일반적인 통일 신라 종과 조금 다르게 몸체에는 비천상 대신 향로를 받쳐 들고 기도하는 듯한 공양자상이 조각되었다. 아울러 연곽 안의 연꽃 봉오리가 돌출되지 않고 납작하며 종구 부분이 8잎의 꽃 모양으로 굴곡을 이루어 한 층 아름다움을 더 해주고 있다.
통일신라 종을 일본에 남아 있는 833년 조구 진자 소장 종에서 볼 수 있듯이 9세기 전반부터 앞뒤에 배치되는 2구 1조의 주악상이 1구씩의 단독 주악상으로 바뀌게 된다. 904년명의 우사진구 소장 종은 통일신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으로 용뉴와 음통의 형식화와 더불어 1구씩 주악상이 몸체에 커다랗게 배치되고 별도의 문양처럼 배치된 명문을 새긴 방형곽이 등장하여 고려 종으로 계승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용뉴는 통일신라 종이 대부분, 용의 입을 종의 상부면에 붙이고 있는 것과 달리 점차 머리가 떨어져 앞을 바라보거나 입안에 표현되던 여의주가 용의 발 위나 음통 윗부분에 부착되기도 한다. 특히 고려 후기 종은 천판과 이어지는 상대 위를 돌아가며 연잎을 위로 세운 독특한 모습의 입상화 문대라는 상징이 새로이 첨가 된다. 이 장식은 고려 전기 종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식적 특징으로 점차 상대보다 더욱 화려하게 포현되어 별도의 독립문양띠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상대와 하대에도 당초무늬나 보상화 무늬 외에 번개무늬, 국화무늬 등의 다채로운 문양이 장식되며 몸체에는 비천이나 주악상 대신 불보살상을 표현하는 예가 많아진다. 아울러 원형으로 된 연곽을 표현하거나 몸체에 연곽과 당좌의 표현이 전혀 엇이 영락만을 장식한 독특한 양식의 범종도 만들어 진다. 특히 고려후기에 들어와 높이 40cm 내외의 작은 종이 많이 만들어 지게 되는데, 건물 안에서 거행되는 소규모의 의식에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고려 말에 와서는 1346-연복사 종을 시작으로 두 마리의 용으로 구성된 용뉴와 음통 당좌가 없어지는 대신 몸체에 여러 줄의 띠를 두르고 팔괘무늬와 범자무늬 등이 장식되는 중국 종 양식이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이후에 제작된 조선시대 종들은 전형적인 한국 종 양식에서 벗어나 중국 종을 모방하거나 중국 종과 우리나라 종이 혼합된 새로운 모습의 범종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고려 말의 범종 양식을 이어받은 조선 초기의 종은 음통이 없어지고 한 마리의 용유는 쌍룡으로 바뀐다, 입상화문대는 없어지고 상대아래에는 별도의 범자무늬가 장식되며 연곽은 점차 상대에서 멀어져 보다 밑으로 내려온다. 당좌는 아예 없어지거나, 있다 해도 그 수나 위치가 일정치 않아 종을 티는 자리로서의 본래 의미보다는 장식 문양으로 바뀌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몸체의 중간쯤에는 중국 종에서 볼 수 있는 두세 줄의 융기선 장식이 돌려지고, 몸체의 빈 곳에 불상이나 비천상 대신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보살 입상이 장식되는 것도 조선시대 범종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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