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중요한 세계전쟁 세계 제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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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그 바탕에 내제된 세계의 역학 구도를 알아야 한다. 세계대전의 원인은 단순히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유럽의 근대국가 성장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농노해방을 통한 부르주의 계급의 성장으로 발전하였다. 영주를 견제하는 왕은 부르주아와 결탁해 절대왕정을 누리다가 시민혁명으로 인해 부르주아 계층이 사회의 신진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산업혁명을 통해 부를 축적하며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반면 독일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격상된 농노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철저하게 진압된 후 제2농노제로 접어들었다. 영국과 프랑스와는 달리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이 없었고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 각성을 통해 농노를 해방하였다. 그러나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근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가며 성장할 무렵 독일은 이제 막 농노해방을 한 단계에 불과했다. 결국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를 따라 잡기 위해 국가주도의 발전을 강행하였다. 전통 귀족인 융커가 그대로 부르주아 계급으로 이어지고 나머지 일반 농노들은 자연스레 무산계급으로 이어졌다. 프랑스가 시민 스스로 국가를 지키는 국민계병제의 원칙을 가지고 국가의 주인이 된다면 독일의 시민들은 국가주도의 원칙에 따르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이런 국가 주도의 발전은 많은 내부의 불안요소를 지니고 있는데 독일은 이런 내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외로 눈을 돌렸다. 유럽의 국제적인 긴장을 격화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비스마르크 실각후의 독일의 적극적인 세계정책의 추진과 이를 위한 군비확장이었다. 독일은 비스마르크시대에 있어서도 열강의 뒤를 따라 아프리카와 남태평양 그리고 중국 등으로 진출하였으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열강의 세계분할에 한 몫 하자는 것이지 열강의 어느 특정 세력권이나 이권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다. 1900년경 열강의 세계분할이 거의 완료되었을 때까지 독일은 계속 강력하게 세계정책을 추구하고 기존 세력권이나 이권을 무시하면서 파고들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은 세계분할이 거의 끝날 무렵 터키 경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직접 그곳을 방문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3B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려 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세계정책의 기본방향은 영국의 3C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의 터키 및 지중해로의 진출정책과도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국제적 불안을 세계대전으로까지 몰고 간 중요한 기본적인 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고, 장기간에 걸쳐 대립을 거듭해 오던 영국과 러시아가 서둘러 타협을 모색하고 협상을 맺은 주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또한 슬라브 민족권이 단결하여 유럽세력에 맞선다는 범슬라브주의 정책과 독일 오스트-항거리 중심으로 연합한 범슬라브주의에 대적하는 범 게르만니즘 민족주의 정책도 세계대전의 원인을 제공했다. 1908년 터키의 정치적 혼란을 틈탄 오스트리아는 베를린조약으로 관리하고 있던 보스니아와 헤르젠고비아를 합병하였다. 이 땅은 전부터 세르비아가 범슬라브주의의 일환이 대 세르지아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탐내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대한 세르비아의 증오를 격화시키게 되었다. 그 후 2차 발칸전쟁이 발생하여 고립된 불가리아는 크게 패하고 그리스는 크레타를 비롯한 에게해의 여러 섬과 마케도니아의 일부를 얻고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도 그 영토를 확장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영토확장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알바니아를 병합하려는 것은 막았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적대감정은 격화되었다. 한편 열강의 제국주의정책의 추구로 국제관계가 긴장하고 서로 다투어 군비확장에 열중하는 상황이 전쟁의 위기를 내포하는 것이 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1899년 러시아황제의 제창으로 군비제한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헤이그평화회의가 열렸다. 29개국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 러시아황제가 의도한 자국의 군사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군비제한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국제중재재판소의 설립, 독가스 사용금지, 전쟁포로의 대우문제 등에 관한 법규가 채택되었다. 1907년에 2차 헤이그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주된 의제인 군비제한에는 역시 실패하였다.
Ⅱ. 제 1차 세계대전의 전개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암살자 프린치프는 세르비아의 테러 조직에 연계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정부가 암살의 배후라고 믿고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전쟁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으로 일어났지만, 근본적으로는 19세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부터 싹텄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주요 원인은 민족주의 대두, 군사력 증대, 식민지 경쟁, 군사동맹체재 등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세르비아를 지원해 연합국을 형성했고,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로 구성된 동맹국이 대항했다. 다른 국가들도 잇달아 연합국이나 동맹국에 가담했다. 초반에는 삼국동맹 측이 유리한 전선으로 이끌고 갔으나 과도한 소모전으로 인한 내부문제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한 미국의 참전등 외부적 요인으로 결국 삼국동맹측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다.
Ⅲ. 제 1차 세계대전의 결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피해는 엄청났다. 군인들 가운데 1000만명이 죽고, 2100만명 정도가 부상당했다. 재산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은 프랑스와 벨기에였다. 전쟁으로 공장, 다리, 철로가 파괴되었으며, 서부전선은 탄피, 참호, 화학 물질로 황폐해졌다. 그리고 대전으로 인해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는 급변했다.
(1) 정치
제1차세계대전은 오스만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정부의 토대를 흔들어놓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같은 독립 공화국과 이탈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의 영토 일부로 나누어졌다. 러시아와 독일도 폴란드에 영토를 넘겨주었다.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서 독립했다. 오스만제국의 아랍지역은 프랑스와 영국의 통제를 받고, 나머지 지역에서 터키공화국이 세워졌다.
(2)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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