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로마의 문화를 만든 민족 에트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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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로마 제국은 대(大)로마 제국이라 불리울 만큼 거대했고, 그 막강한 국력만큼이나 훌륭한 문화, 문명을 이룩하였다. 로마 제국은 유럽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으며, 유럽을 통해 전 세계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로마는 아시아의 중국과 더불어 세계 문명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로마는 그리스를 점령하여 로마 문명의 근본에는 그리스 문명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 중심적인 사상, 민주적인 정치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로마 제국이 세워지기 전, 지중해 가운데의 반도에 먼저 자리잡은 민족이 있었으니, 바로 생소한 이름인 에트루리아 민족이다. 이 에트루리아는 로마를 속국으로 삼아왔었고 따라서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았고 더 나아가 지금 우리도 에트루리아의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에 들어 로마 문명의 진정한 뿌리인 에트루리아 문명이 재조명받고 있다. 그래서 에트루리아의 역사와 그들이 로마 문명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2. 에트루리아 민족
에트루리아(Etruria) 민족은 이탈리아 반도에 가장 먼저 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이들의 기원은 크게 3가지 설이 있는데, 북방에서 내려왔다는 남하설(南下說), 동방의 소(小)아시아로 부터의 도래설(渡來說), 예전부터 살아왔다는 토착설(土着說)이 있는데, 소아시아에서 왔다는 도래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여겨진다. 헤로도토스 등의 고전에서도 이를 말하고 있는데, 기원전 10세기경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문명이 먼저 발달한 중동지방에서 건너왔기 때문에 동방의 전제 군주 체제를 계승하여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국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 자리를 잡았고, 그 밑으로 라틴족, 그 밑으로는 그리스 인들이 도시국가를 세워 살았다. 에트루리아 민족은 해안지대에서 내륙으로 세력을 뻗쳐서 기원전 6세기 이후에는 라틴족이 세운 로마 제국을 에트루리아계의 왕 지배하에 둔 적도 있었다. 이렇게 이들이 번성할 수 있었던 기초에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활발한 해양무역을 들 수 있다. 에트루리아는 12개의 도시국가 연합체제로 대표로는 웨이이, 카에레, 타르키니, 페르시아 등이 있다. 기원전 5세기까지 그 영향력을 넓혀갔으나, 이때부터 라티움 도시의 독립 운동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4세기 초 로마가 주요 도시인 웨이이를 멸망시키는 것을 비롯하여 다른 도시도 정복되었고, 권력자들이 로마로 귀속됨에 따라 에트루리아 민족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예술적인 문화는 로마로 계승되었다.
3. 에트루리아와 로마의 관계
로마는 갓 건국하였을 당시에 조그만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북쪽에 있는 강국인 에트루리아의 영토에 속하는 속국이 되었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도시였고, 에트루리아 왕을 섬겼다. 에트루리아 민족은 해상무역을 주업으로 살고 있었기에 무역적으로 요충지인 로마를 주요 항구로 삼았고 로마에서 많은 무역을 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대도시로 성장하였고 로마 사람들은 덩달아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결국에는 5세기 말부터 로마의 독립 투쟁이 시작되었고 이를 제지하기 위하여 에트루리아의 왕인 타르퀸은 로마 항구를 폐쇄하여 로마의 경제력을 떨어뜨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에 대해 복수심을 가지게 되었고 기원전 509년, 훗날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는 루키우스 주니우스 브루투스를 중심으로 에트루리아를 몰아내고 독립을 이룩하게 된다.
4. 에트루리아가 로마 문화에 미친 영향
에트루리아 민족은 지중해를 해상무역을 주업으로 하였고, 그 주된 무역 대상은 그리스였다. 따라서 그리스의 예술적인 문물은 자연스레 로마로 전달되었고 찬란한 로마의 문화의 근본이 된 것이다. 에트루리아가 로마에 전해준 것 중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알파벳이다. 에트루리아는 그리스의 알파벳(α,β,γ,δ,...,χ,ψ,ω)를 그들만의 표기법으로 바꾸었고 이를 로마인들이 받아들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자(A,B,C,D,...,X,Y,Z)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또한 에트루리아 사람들은 그리스의 신화를 로마에 전하여 두 나라간의 신화는 거의 동일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 신화를 흔히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아울러 부르는 까닭이다.
게다가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소재인 로마의 검투사 경기는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만든 오락거리이고, 영화 ‘벤허’의 소재인 마차 경주 또한 에트루리아에서 먼저 하던 것이다. 이 외에도 연극을 로마에 전파하였고, 몸을 천으로 두르는 로마 귀족의 패션인 토가 또한 에트루리아의 의상이었다. 또 건축적인 부문에서도 소아시아의 바빌론에서 쓰이던 아치형 건축방식을 가져온 에트루리아 민족 덕분에 로마는 딱딱한 그리스 건축에 비해 더 선진화된 아치형 건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로마 문명의 거의 모든 것은 에트루리아 민족에 의해 전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건축의 측면에서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살펴보자. 고대 로마는 그리스의 헬라 양식을 모방한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바닥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를 지붕으로 덮는 구조로, 기둥을 중시하는 건축 양식이다. 대표적으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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