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문의 이해 당송 팔대가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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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당송팔대가는 당대와 송대 사이의 걸출한 산문작가 여덟 명으로, 당나라의 한유·유종원, 송나라의 구양수·소순·소식·소철·증공·왕안석을 일컬어 당송팔대가라 한다. 당나라 때 한유와 유종원은 당시 만연했던 변려체 풍조를 반성하고 진한시대 이전의 유교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의 고문운동을 일으켰다. 고문운동은 성공하는듯 하였으나 이후 한유와 유종원이 죽으면서 그 기세가 꺾였다. 그러나 송대의 구양수가 한유의 문집을 표본으로 삼아 다시 한 번 알기 쉽고 쓰기 쉬운 문장을 쓰고자 하는 운동을 일으키면서 소순·소식·소철·증공·왕안석 등과 같은 뛰어난 문장가가 배출되었다.
한유(768년~824년)는 하내군 담양 출신의 인물로, 자는 퇴지, 호는 창려이며 시는 한문공이다. 한유는 30세에 진사에 합격해 36세에 감찰어사가 되어 당시 장안 시장이었던 이정의 폭정을 지적하다 지방의 현령으로 좌천되고 만다. 이후 50세 때 다시 한 번 자리를 다시 얻게 된다. 그러나 2년 후, 헌종이 불골을 조정에 들이려 하자 반불주의였던 한유는 <불골을 논하는 표>라는 상소문을 올려 이를 막으려 하였는데 이에 천자의 분노를 사 지방의 지사로 좌천되고 만다. 그러나 이듬해 헌종이 죽은 후에는 다시 소환되어 점차 그 위치가 상승하여 이후에는 관리임명권을 가지는 이부시랑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57세의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처럼 그는 젊은 나이에 조정의 일에 몸을 담근 후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죽을 때까지 관직을 지키며 국가의 정치운영에 일조하는데, 그의 평생 동안의 정치행적을 살펴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절개를 가진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번번이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였던 것은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에게 바른 소리를 하거나 옳지 못하다 생각되는 임금의 정책에 여과 없이 간언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 상황에서 현실과 타협하기 보다는 한 번 굳힌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지켜내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지조 있는 인물이었다. 한유의 문장은 크게 다음과 같은 문학적 특징을 가졌다. 첫째, 그의 문장에는 유교를 존숭하는 그의 사상의 반영되었다. 불교를 철저히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였던 그는 문장을 적는 데 있어 그 문장 속에 마땅히 유교의 도리를 담아야 한다고 여겼다. 둘째, 문장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 돌려 말하는 것이 없고 주제를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한유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자신의 글을 담은 문집, <한문공집>이 있다. <한문공집> 중 그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한 문장을 추려내 보면, 古之學者는 必有師니 師者는 所以傳道, 授業, 解惑也라, 즉 ‘옛날의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스승이 있었으니, 스승이란 도를 전해주고 학업을 전수시켜 주고 의혹을 풀어주는 까닭이다’와 같은 문장을 들 수 있다.
유종원(773년~819년)은 자는 자후(子厚)로, 당 고종 때의 재상인 유석의 후손이자, 멀리는 서초 황제 의제의 후예이기도 하다. 그는 33세의 나이에 진사를 거쳐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 해, 그는 유우석 등의 인물들과 함께 정치개혁운동을 도모하였는데, 이는 당시 횡포가 심했던 환관과 이를 이용하는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는데 그 취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급격한 정치개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유종원은 영주사마로 좌천되고 만다. 이후 다시는 중앙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였고 43세 때 유주자사로 옮겨 간 이후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봉건사회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인물이다. <봉건론>이라는 유명한 제목의 글에서는 유종원의 비판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생각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그의 사상적 특징을 살펴보면, 그는 한유의 유신론에 따른 천형에 반대하고, 순자의 하늘과 사람을 나누는 개념을 그대로 계승하여 하늘은 태어나고 죽는 것, 재앙 혹은 환난 등에만 관여할 뿐, 여타 법률이나 전쟁, 민란 등은 모두 인간의 일이라는 무신론을 내세웠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중시하는 관념들도 일반 자연들과 다를 바가 없었고, 이에 따라 원기 일원의 유물론이 성립되었으며, 그의 이론은 인간의 능동성과 평등성을 표방하게 되었다. 봉건제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귀족들의 부패를 개혁하고자 하였던 그의 정치적 행적은 이와 같은 유물론적 이론에 기반한 것이었던 듯하다. 유교사상이 만연하던 당시에 인간의 평등성을 표방하는 유물론을 주창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유물론적 이론은 가히 혁신적이라고 할 만하다. 유종원의 좌천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큰 타격을 입은 것이었으나, 그의 문학은 좌천 이후 크게 발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는 주로 산수 등 대자연과 관련된 시를 지으며 자신을 위로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대자연의 풍경을 묘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자연의 풍경에 자신의 심경을 비추어 묘사함으로써 그 예술성이 극히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그는 산문을 쓰는 데 있어 우언에도 매우 뛰어났다.
구양수(1007년~1072년)는 자는 영숙 혹은 취옹이었으며, 익호는 문충이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곤궁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비록 어려운 집안형편으로 인해 정규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학업에 매진하여 17세 때 처음으로 지방고시에 참가하게 된다. 비록 첫 지방고시에서는 떨어졌으나 이후 명사 서언의 눈에 들어 그의 문하에 받아들여져 학문을 가다듬은 뒤 그 해 겨울 춘계국자감고시에서 수석을, 그 후 국학에서도 수석을 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30세에 진사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편히 출세의 길을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혁파의 의견에 동조하고 그들을 옹호하였고 이로 인해 이능 현령으로 좌천되고 만다. 인종의 간관으로서 채택되었다 개혁운동으로 인해 다시 좌천당한 후, 또다시 십여년이 흐른 뒤, 노모를 모시고 사는 구양수를 가엾게 여긴 인종이 그를 다시 불러들이고, 그는 다시 한 번 한림학사 등의 요직에 임하게 된다. 중앙의 관직에 재직하면서 그는 소식, 소순, 왕안석 등의 인재를 발굴하게 되고 정계 은퇴 후에는 은둔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한다. 그는 한유의 문체를 모범으로 보고, 당대에 그 끝을 보지 못했던 고문운동을 송대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특히 文道合一, 즉 ‘글과 도는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라는 그의 주장에서, 한유의 고문운동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그는 한유의 以文爲詩, 즉 ‘문으로써 시를 삼는다’라는 시의 작법을 이어받으면서 시의 그의 의론화와 산문화라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산문에 있어서는 사람들의 생활이나 자연을 묘사한 <취옹정기>가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그는 당대에서 맥이 끊긴 고문운동을 송대에 이르러 다시 일으키고, 조정에 재직하며 산문운동을 이어갈 후대들을 양성하는 역할까지 해냈다는 점에서, 중국 산문사상, 더 넓게는 중국 문학사상 큰 의미를 가지는 인물이라 생각된다. <취옹정기>중 한 문장을 추려내 보면, 峰回路轉에 有亭翼然하여 臨于泉上者는 醉翁亭也라, 즉 ‘봉우리를 도니 산길 구불구불, 날개를 활짝 펼친 새처럼 정자가 있어 샘 위에 임해있는 것이 바로 곧 취옹정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소순(1009년 ~ 1066년)은 자는 명윤, 호는 노천으로 미주 미산 출신의 문인이다. 그는 27세 때부터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계속된 과거시험 낙방에 관리의 길을 걷고자 하는 꿈을 접고 정치와 역사평론 저술에 힘썼다. 47세 때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구양수에게 가 글솜씨를 선보이고 그 재주를 인정받아 조정에 천거되었고, 두 아들인 소식과 소철 또한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오로지 과거급제에만 전념하기 보다는 유동성 있는 처신을 했던 정치가이자 문학가라는 생각이 든다. 소순의 문장은 논리적이면서도 정열적이고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롭고 정리가 잘 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들 소순·소식·소철을 묶어서 삼소라 부르기도 한다. <상전추밀서>에서 소순의 문장을 살펴보면, 於此見天之所以與我者 不偶然也, 즉 ‘이것으로써 하늘이 우리에게 자질을 부여해준 까닭은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소식(1037년~1101년)은 자는 자첨, 호는 동파거사로 흔히 소동파라고 불리운 송대의 문인,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인물이다. 그는 22살의 나이에 이른 과거급제를 한 후 구양수의 밑에서 문학적 소양을 길렀다. 정계에 진출한 후에는 당시 왕안석이 주창한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두 번의 유배를 가게 된다. 계속되는 신법당과 구법당간의 정파싸움 속에서 세월을 보냈던 그는 결국 귀양길에서 돌아오던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소식의 정치적 사상은 유교적·불교적·도교적 사상이 혼합된 사상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유교사상에 기반해 나라와 백성을 책임지고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투철한 사명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불교나 도교에서 영향을 받은 현실도피적 사상 또한 가지고 있어 물질세계를 초월한 정신세계에서 노닐고자 하는 사상 또한 그에게서 나타난다. 이와 같이 현실에 초연한 그의 사상이 오히려 계속되는 유배생활을 견디게 해 주는 힘이 되어 준 듯하다. 시에 있어서는 소식 또한 한유의 以文爲詩의 풍조를 이어받아 서정적인 당시와는 달리 이를 강조하는 개념화된 시를 주로 썼다. 시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 문학사상 최초로 호방사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이기도 하였다. 그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전적벽부>, <동파전집>등이 있다. <전적벽부> 중 한 문장을 추려내 보면, 浩浩乎如憑虛御風而不知其所止하고 飄飄乎如遺世獨立하여 羽化而登仙이라, 즉 ‘넓고도 넓은 것이여, 허공을 타고 바람을 모는 것 같아 그 머물 곳을 알지 못하고 가벼이 떠오름이여, 세상에 버려져 홀로 서 있어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었구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소철(1039년 ~ 1112년)은 자는 자유, 호는 영빈으로 소식의 아우로서 송대를 풍미한 문인이자 정치인이다. 형 소식과 함께 진사에 급제하여 정계에 진출하였으나, 신법당과 구법당의 대립 사이에서 관직에 돌아오고 좌천되고를 반복하였다. 한림학사, 문하시랑 등을 역임한 그는 고문학자로서 불교의 영향이 농후한 고문을 주로 썼다. 대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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