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의 기원과 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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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반도에는 신석기 이래 끊임없이 북방민족이 이주했으며, 이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한민족의 연원을 이루었다. 한반도의 민족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단일민족화가 되었지만 나말여초나 고려왕조의 성립시기, 조선건립시기의 혼란기에도 북방민족이 반도에 들어와 구성원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한반도의 전통적인 농경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기존 북방민족의 선조들이 살아왔던 유랑민의 습관으로 살아왔으며, 고려의 양수척, 화척 조선시대에는 백정이라 불리며 민족에 동화되지 못하고, 비록 고려시대와 달리 일정지역에 정착하여 특수분야에 종사했던 백정(白丁)은 민족에 동화되지 못한 이질감에서였는지 신분은 양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민층중에서도 최하층 천민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숨죽이며 살아왔던 백정은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나서야 자신들에 대한 부당한 박해에 도전했다.
고려의 백정과 조선의 백정은 전혀 달랐다.
고려시대에 백정은 일반농민층을 지칭했으나 조선시대의 백정은 도살업에 종사하던 천민층을 지칭했다. 고려시대에서는 군역의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을 정호(丁戶)라고 불렀고, 백정은 정호가 아닌 사람 즉, 농업에 종사하지만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사람들 일반농민층을 백정이라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백정은 신라말,고려초기 때부터 유입된 유목민들이 한반도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목민처럼 수렵, 목축을 하거나 유랑생활을 하였고, 이들은 고려시대에 양수척, 화척이라 불리워 졌으며, 조선왕조의 건립이후 제정기반 확보 차원에서의 양인의 절대적 필요로 인하여 양수척, 화척을 정착시키고 농사를 가르치게 되면서 이들을 백정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런데 양수척, 화척이 백정의 칭호를 얻게되자 일반농민층을 지칭하던 의미는 사라졌다. 조선왕조의 강력한 국가시책으로 인하여 어떻게 해서든 정착을 하여야 했지만 농경민으로 동화되진 못하였고 수렵, 목축등의 생활에서 터득한 짐승도살의 기술을 살려 도살업에 진출했고 조선중기 이후 백정이 도살업을 독점했다.
백정의 다양한 직업.
조선시대 백정은 주로 도축업에 종사했지만, 모든 백정이 도축업에만 종사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이 종사한 업종들은 모두 천하게 여겨져 일반인들은 하지 않았다. 고리를 제조, 고리바구니를 만들어 파는 고리백정, 악기연주와 가무 재주로 구걸하며 유랑하는 백정, 속칭 망나니로 불리던 사형집행을 맡던 회자수(?子手), 피혁제조업에 종사한 갖바치 등이 백정의 직업에 속하였다. 이들 중 도축업에 종사하는 백정이 가장 부유한 편이었다. 도축은 경제적인 많은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백정에 의한 밀도살이 흔하게 이루어 졌으며, 이로 인해 백정 중에는 상당한 부를 이룬 사람도 있었다.
양인이 최하층 천민으로 전락하다.
조선에서의 백정은 일반인들조차 상종하지 않으려 했을 만큼 멸시의 대상이었다.
백정에 대한 사회의 천대와 멸시는 조선왕조가 멸망한 이후에도 지속되었을 만큼 뿌리깊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직업으로 인하여 신분이 노출되고 있어서 노비들처럼 도망만으로 신분을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백정은 노비와 달리 신분상 천민이 아니라 양인이었고, 조선초기만 해도 백정신분은 후기만큼 열악한 대접을 받지는 않았다. 후기에 이르러 백정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고 최하층의 천민층으로 하락하게 된데는 조선정부의 특별한 차별청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정 지역에 정착시키기 위하여 통행증서를 지참하여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활동범위를 제한했고, 특정지역을 지정해 별도로 호적을 작성하였으며, 정착에 대한 일을 담당자의 인사고과 평가의 기중으로 삼았다. 형벌도 가혹하게 적용되어 백정에 대한 대점을 짐작할 수 있다.
상여도 쓸 수 없었던 백정들의 서러움.
정부의 법제적 차별보다 백정을 괴롭힌 것은 일반인들의 천시와 멸시였다. 백정은 일반인들과 차별되어 취급당하였다. 상을 당해도 상여도 사용하지 못했으며, 묘지도 일반인들의 묘자리 와 따로 자리를 잡아야 했고 사당도 만들 수 없었다. 결혼할 때도 말이나 가마를 타지 못했고, 여자는 비녀를 꽂아 머리를 올리지 못했다. 이런 금기를 어겼을 때는 그 지역 주민들이 모두 동원되어 백정을 처벌했다. 이런 차별대우를 개선시키고자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 날 때 백정처우의 개선을 개혁안의 하나로 요구하기도 했다. 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법제상으로 해방되었지만 실제로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다.
참고문헌
참고자료
무속이야기-손숙희
조선조 국행의례연구-최종성
http://seoul600.visitseoul.net
이형화 조선시대사, 가람기획
강만길 외, 한국사 , 한길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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