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왜 평양으로 천도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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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평양천도:『삼국사기』<고구려본기>장수왕조는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2. 남하정책: 북한의《조선전사≫3권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은 고구려의 국가 발전에 서 큰 의미를 가졌다.”→평양 천도가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경제문화 발전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임 “나라의 정치, 경제, 군사의 중심지인 수도가 먼 북쪽의 국내성 으로부터 당시 조선 서북지방의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충지인 평양에 옮겨옴으로써 고구려는 이 곳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더욱 힘있게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 편《한국사≫5권 “광개토왕을 이은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강력한 남하정책을 추진하였다(68쪽).”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남하정책을 본격화하였다. 내륙 교통의 요충지인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진출의도를 드러낸 것도 이때를 전후한 시기의 일로 보인다(70쪽).”
⇒이처럼 남북한 모두 평양 천도가 남하정책에 주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실제 로 평양 천도 후 고구려는 남하정책을 추진했는데 주된 대상은 백제였다. 장수왕의 고조부인 고국원왕은 바로 백제의 정복군주 근초고왕에게 전사했던 인물이다. 이런 원한을 갖고 있는 고 구려의 왕실에서 평양 천도 후 남하정책을 전개한 것은 당연한 것임.
3. 문제 제기: 장수왕이 백제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펼친 때가 평양 천도 후 무려 48년이 지 난 장수왕 63년(475)이라는 점. 당시 장수왕의 나이는 여든두 살이었다. 서른네 살의 한창 나이 에 천도해 좋은 세월 다보내고 미수(米壽)가 가까운 할아버기자 되어 본격적인 남하정책을 전 개함.
⇒《삼국사기≫에는 이때 장수왕이 백제에 간첩을 보내 내부를 분열하는 계책을 사용→승려 도 림을 보내 개로왕에게 접근시켜 국력을 소진시키는 게략[그러나 궁실 수리와 부왕의 묘 이장을 빼놓고 산성 개축이나 둑을 쌓은 것 등은 방어와 백성들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 기미를 읽고 전력을 다해 방비했다는 사실을 증명.]
⇒장수왕 63년 9월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에 침입해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켰으며 백제의 개로왕을 사로 잡아 죽였다. 그런데《삼국사기≫에는 장수왕이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돌아 왔다”고 기록→백제의 서울을 함락시키고 국왕까지 살해했으면서도 남하를 계속해 백제를 멸망 시키지 않고 ‘돌아온’ 것이었다. 이는 장수왕의 백제 공격의 목적은 선조의 원수를 갚기 위한 조치였다(북위가 백제에 보낸 국서에 “장수왕의 백제공격은 선군(先君)의 옛 원수를 갚으려는 것”) 또한 이 전투로 고구려는 한반도에서 우위를 결정지었다.→신라는 416년 사망한 실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 분쟁이 일어나자 장수왕은 개입해서 눌지왕을 밀어 왕으로 만듦. 그리고 신라의 북방 진출에 대비해 국원성을 설치하였을 뿐임
⇒장수왕은 죽위한 해(413)에 남조의 동진에게 사신을 보내 교섭을 재개하고 북위가 화북을 통 일할 기미가 보이자 재위 23년(435)에 북위에도 사절을 파견해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중국이 남북조로 분열된 틈을 이요애 남북조 모두와 국교를 수립해 간섭을 배제하면서 남하정책을 강 행함.
⇒장수왕이 본격적인 남하정책을 펼친 때가 평양 천도 48년 만이라는 점과 한성을 빼앗기고 도 망가는 백제군을 끝까지 추격하지 않은 사실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목적이 남하정책이라 는 기존의 통설에 의문을 가지게 함→한국의 서영대나 임기환 같은 학자들은 “고구려의 평양천 도는 전제 왕권의 초부족적 성장과 정치세력 재편성을 목적으로 단행된 것”으로 보고 있다.
4. 평양 천도는 고구려 내부의 권력투쟁: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 효문제에게 보낸 국서 “…만일 황 제의 인자와 간절한 궁휼이 멀리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러면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청소하게 하며,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 마굿간 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匹夫)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 지 않겠습니다.…지금 연(璉:장수왕)의 죄로 나라는 어육(魚肉)이 되었고, 대신(大臣), 호족(豪族) 들을 끝없이 살육하여 죄악이 천지에 가득히 쌓였으며,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으니 이 는 멸망의 때입니다.”→효문제의 답서 “고구려는 선대의 조정에서 번신(藩臣)이라 칭하며 봉고 암이 오래인지라, 그대들과는 오래 전부터 틈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아직 영을 어긴 허 물이 없다.”
5.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주목적이 남하정책에 있었다기보다는 백제의 개로왕이 보낸 국서에 서 주장한 대로 왕권에 도전하는 ‘대신(大臣), 강족(强族)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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