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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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자신의 전공과 세종과의 연관성을 찾던 나는 고민에 빠졌다. 임산공학과에서 배우는 것은 나무를 더 가치 있게, 더 오래도록, 더 잘 쓰는 방법에 대한 것들이다. 과목들을 살펴보면 목재해부학, 목재물리학, 목재화학, 등등... 기본적으로 나무에 관련된 과학과목들이다. 세종시대에 임산공학이라는 학문이 있을 리가 없을 뿐더러 어떤 연관성을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나무”였다. 구체적인 과목들을 접고 나무라는 접점만을 찾아보려 했다. 그래서 나무 하면 떠오르는 것이 우리의 문화유산 중에 팔만대장경이 떠올라 실록을 조사해보니 세종시대에 많은 내용이 있었다. 이번에 팔만대장경에 대해 조사하면서 새로운 사실과 팔만대장경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팔만대장경에 대한 사실과 실록의 내용을 발췌하여 서술하고 나의 생각을 피력해 보겠다.
정식명칭이 고려대장경인 팔만대장경은 경판 수가 8만 여장에 달해서 흔히들 팔만대장경이라 부르고 있다. 전해오는 바론 이 엄청난 양의 대장경판의 목재는 뻘밭에 3년간 묻었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산벚나무가 64%, 돌배나무가 14%정도 차지한다. 산벚나무는 지금도 전국에 고루 분포하는 흔한 수종이다. 고려인들은 경판을 만들 당시, 엄청난 양의 나무를 필요로 해서 이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택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판각에 좋은 나무를 선별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경판의 필사본을 붙일 때는 먼저 필사본을 뒤집어 붙이는데 그래야 나중에 인쇄할 때 글자가 바로 찍히게 된다. 그리고 들기름을 솔에 묻혀 필사본 위엔 들기름을 한차례, 필사본에는 기름칠을 먹인다. 기름 먹은 종이는 글자가 뚜렷하게 살아난다. 이 기름이 마르면 조각을 한다. 마구리라는 것이 있는데 목판의 양옆에 보다 두꺼운 마구리용 목재를 끼우는 것으로 인쇄할 때 손잡이용으로 사용 되었다. 또한 경판을 보관할 때 글자 면이 서로 닿지 않도록 사이를 떼어놓는 역할까지 한다. 경판의 네 귀퉁이엔 금속이 부착되어 있는데 글자판을 단단하게 고정시켜, 오래돼도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거기다 보존을 위해 옻칠을 하는데 방부와 방충효과 외에도 방수가 뛰어나고 화학적인 내성도 강하다. 특히 나무와 친화력이 높아서, 경판 보호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당시에 베껴쓰기만 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세계를 보면 고려의 인쇄문화는 일찍부터 세계 최고였었다. 신라 때인 706년에 만들어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이다. 이런 신라의 인쇄술이 고려로 이어져 발전을 거듭했고 대장경이 탄생된 것이다. 경판의 제작년도는 경판의 말미에 있는 간행기록에 1237년부터 1248년까지로 12년간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사 기록을 보면 ‘왕과 군신이 서원하고 도감을 세워 16년에 걸려 완성했다’라는 말이 있다. 사전 준비부터 총 16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했던 것이다. 16년간 8만장의 경판을 만들기 위해선 상당한 물자와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8만여장의 경판에는 통나무 15000개 이상이 필요하다. 필사가들은 하루에 천자정도를 쓸 수 있는데 필사하는 스님들이 5천만 자를 전부 써내자면 연인원 5만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요된 한지의 양만도 16만장 정도인데 실제론 약 50만장쯤 소요 됐을 것이다. 원료인 닥나무 채취에서부터 한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물질하는 사람까지 하루 한사람이 50장정도의 한지 제작이 가능한데 연인원은 만명쯤이 된다. 판각을 위해서는 하루에 40자 정도가 가능하므로 연인원 125만명에 달하게 된다. 옻칠을 위해 옻액이 상당량이 필요했텐데 400그램이면 80장의 경판을 칠할 수 있고 필요한 옻액은 총 40만 그램으로 연인원 천명이 동원되어야 가능하다. 그 외에 마무리 작업을 위해 내용을 교정하고 구리장식을 만들고 등의 여러 일손이 필요하다. 그만큼 고려 5백년간 가장 큰 국책사업으로 오랜 기간과 많은 인원 많은 나무가 필요 했을 것이다.
세종실록에서 팔만대장경에 대해 언급된 부분은 굉장히 많았다. 수업시간에 잠시 들었었지만 대장경이 화친의 목적으로 큰 가치를 가졌다는 것에 대해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세종 007 02/01/06(을사) / 일본국 사신 양예를 맞이하여 《대장경》 1부를 주고, 화친을 다지다. ;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 일본국사신 양예를 맞아 “너희들의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하니, 양예가 대답하기를, “대장경(大藏經)뿐이올시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장경은 우리나라에서도 희귀하다. 그러나 1부(部)는 주겠다.”고 하였다.
● 세종 007 02/01#15(갑신) / 일본에서 사절을 보낸 데 대한 답례로 대장경 전부를 보내다. ; 일본국에서 사절을 보낸 답례로 일본왕에게 사절을 보내어 답한 내용 중에는 “이제 송희경이 대장경(大藏經) 전부를 가져가며, 또한 변변치 않은 토산물로 사례하는 뜻을 표시하오니,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 이 부분을 보면 대장경의 가치는 이미 일본에서 눈치를 채고 있었고 그들에게는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불교 문헌이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단순히 대장경 판에 대한 가치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한 선망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 세종 010 02/12/08(임인) / 일본국 구주 도원수 우무위 원도진이 대장경을 요구하면서 토산물을 바치다. ; 일본국 구주 도원수(九州都元帥) 원도진(源道鎭)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과 대 종(大鐘)을 구하였다.
● 세종 014 03/11/16(을해) / 일본 구주총관 원의준이 공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청구하다. ; 일본 구주총관(九州摠管) 원의준(源義俊)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대장경(大藏經)을 청구 하였으며, 평만경(平滿景)과 종금(宗金)도 또한 모두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 세종 018 04/11/13(병인) / 왜인이 토산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청구하다. ; 일본의 구주 도원수(九州都元帥) 원의준(源義俊)이 본국 황태후(皇太后)의 명령으로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인하여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였다.
● 세종 018 04/11/16(기사) / 일본 국왕이 서간을 전하고 《대장경》을 청하다. ; 일본 국왕과 그 모후(母后)가 중(僧) 규주(圭籌) 등을 보내어 서간(書簡)을 전하고 방물(方物)을 바치며 대장경(大藏經)을 청구하는 글월에, “... 탑원(塔院)에서 대장경을 안치(安置)하고 아침과 저녁으로 읽어, 사은(四恩)을 보답하고 삼유(三有)에 이바지하려고 하오나, 그 책을 얻을 수 없어서 귀국에 가서 이를 구하려고 .... 삼가 청하건대, 그 간절한 뜻 을 불쌍히 여기시어 경전 전질(全秩)을 갖추어 7천 권을 보내주시면 나도 함께 그 혜택을 받으려고 하나이다.
● 세종 018 04/11/26(기묘) / 인정전에 나가 대장경을 청구하는 일본 국왕 사자를 맞이하다. ; 임금이 중 규주(圭籌)를 접견하는 내용 중에는 “태후가 나에게 명하되, ‘새로 절(佛宇)을 짓고 대장경(大藏經)을 조선 국왕 전하께 청구하고자 하나 나는 부녀(婦女)라 이 뜻을 친히 여쭙지 못하다가 .... 절도사(節度使)를 통하여 조선국에 이 뜻을 여쭈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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