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론 - 생애, 작품 경향과 문학적 특성, 시론, 문학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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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雨杜) 김광균論
1. 생애 김학동 외(2002), 『김광균 연구』, 국학자료원
김광균은 1914년 1월 19일 경기도 개성에서 포목도매상을 하던 아버지 김창훈과 어머니 한순복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광균은 지난날을 회고한 자전적인 <금가>에서 유년기의 기억으로 개성 시내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것을 ‘땅거미가 깔리면서 어둑어둑할 무렵 전등불이 켜지자, 온세상이 대낮처럼 밝고 불빛이 안마당에서 헛간까지 환하게 비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김광균(1986),『추풍귀우』, 범양사 출판부
’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유년 시절에 전등에 매료되어 이후 ‘와사등’을 비롯하여 ‘전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쓰게 된다. 김광균이 열 두 살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며칠만에 돌아가시게 된다. 불의에 아버지와 사별한 김광균은 어리 나이였음에도 장남으로서 어머니와 함께 채권단에게 온갖 시달림을 받게 된다. 자녀들의 혼사가 무효화되거나, 집이 차압을 당하고 심지어 자식들이 아버지의 부채를 갚아야한다는 문서까지 쓰라는 협박을 받게 된다. 그의 어머니가 사정한 끝에 부친의 부채를 자식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불망기(不忘記)’를 써 받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열 네 살 되던 유년시절에 그는 누이의 요절 앞에 또 슬픔을 겪게 된다. 이렇듯 어릴 때 겪었던 아버지와 누이의 죽음은 김광균을 ‘비애의 시인’으로 만들게 하였다.
힘겹게 유년시절을 보낸 김광균은 원정소학교를 마치고 개성상업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그 곳에서 학생 몇 명과 김재선, 최창진, 김영일 등이 모여서 ‘연예사(硏藝社)’라는 동호인 단체를 만들고 동인지 『유성(流星)』을 간행하기까지 이른다. 이 무렵 김광균은 일간지와 월간지에도 많은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김광균이 상업학교를 마치고 군산으로 떠나게 되자 모임은 흐지부지 해산하게 된다.
김광균은 1931년 10월 경성고무공업주식회사 군산지사에 입사하게 되고 1935년에 김선희 여사와 결혼하게 된다. 이윽고 1938년에 군산지사에서 서울 본사로 옮겨오게 된다. 이미 많은 시작품을 중앙 일간지와 월간지에 발표하여 문단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으나 중앙문단에 참여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조선일보사의 사회부기자로 근무하던 김기림은 김광균의 『와사등(瓦斯燈)』의 시편들을 ‘특이한 방언’을 가지고 나타난 시인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이들은 소공동의 ‘낙랑’다방이라는 곳에서 처음 교유하게 되고 이 때, 김기림으로부터 프랑스 시단의 동향과 시와 회화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등을 듣고 큰 충격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흐의 <수차가 있는 가교>를 처음으로 보고 ‘두 눈알이 빠지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전집』을 구하여 거기에 빠져들고 회화의 바다에 표류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무렵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이 계기가 되어 그의 시작세계가 회화적인 기법으로 훨씬 기울게 되었다는 것이다.
직장을 서울 본사로 옮기면서 중앙문단에서의 활동이 본격화된 김광균은 이봉구, 오장환, 이육사, 이병각, 김관 등을 위시하여 몇몇 화가 친구들과 만나다가 그들을 중심으로 자오선 동인을 결성하고 시지 『자오선』을 간행하기까지 한다. 간혹 그를 시인부락 동인에도 가담했던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시인부락』지에는 단 한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시인부락의 동인들과 친교만 있었을 뿐, 실제로 동인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40년을 전후하여 서울 종로구 계동으로 이사한 그는 이웃한 화가 구룡산인 김용진으로부터 ‘우두(雨杜)’라는 아호를 받기도 한다.
김광균은 1939년 8월 오장환이 경영하던 남만서고에서 출간된 첫 시집 『와사등(瓦斯燈)』을 비롯하여 『기항지(寄港地)』 등을 펴내는 등 1930년대 중반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 시작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전쟁 이후 사업을 하던 아우 익균이 납북되자, 집안의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사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1957년 7월 산호장에서 장만영의 손을 빌어 제3시집 『황혼가(黃昏歌)』를 출간하면서 시단과 결별하고 오랫동안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실업계에 투신하여 재계의 요직을 맡는 등 사업가로서 성공의 길을 걷게 된다. 국제상의한국위원회 감사(1959), 무역협회 부회장(1960), 한국벽지조합 이사장(1962), 중앙농약 회장(1966), 한양로타리클럽 회원(1974), 전경련통상위원(1975), 금용통화위원(1977), 국제연합한국협회 부회장(1982), 대한상공회의소 상임위원(1982), 한국캐나다경협 부회장, 한양로타리클럽 회장(1984), KS물산주식회사 사장(1987)등을 역임했다.
김광균은 오랜 침묵을 깨고 1980년대 중반에 노년의 친구들이 모여 회귀동인을 결성하여 다시 문단에 복귀한다. 동인들로는 구상, 김중업, 김태길, 민영규, 백선기, 송지영, 이성범, 이용희, 이주홍, 이한기, 정비석, 차주환, 최호진, 황순원 등이 있다. 회귀동인은 무턱대로 새로운 것만 찾는 세태를 경고하고 면학과 정진을 다짐하는데 목적을 두고 시작활동을 한다. 김광균은 이 무렵부터 문단의 전면에 나타나 왕성한 시작활동을 하게 되는데 『회귀』를 비롯하여 『현대문학』, 『문학사상』, 『문학정신』 및 여타의 신문이나 잡지에 많은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이들을 모아 『추풍귀우』 등을 출간한다.
김광균은 1988년 가을 중풍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뒤 조금 회복하여 퇴원한 뒤 제5시집 『임진화』 를 펴내는 등 마지막까지 열정적으로 활동한 시인이었다. 하지만 병석에 누운 지 5년이 지난 1993년 11월 23일 자택에서 타계했다.
2. 작품 경향과 문학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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