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길 -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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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
1970년대는 산업화 시대, 경제 입국의 시대라 불릴 만큼 한꺼번에 여러 방면의 변화를 드러냈던 시기이다. 그 여파로 비인간적, 비윤리적 몰가치(沒價値) 현상도 나타났고 이에 따라 소외되고 병든 변두리 인생의 길을 걷는 인간도 많아졌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전형이다. 오로지 지식인으로서의 자존심 하나만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권씨야말로 시대적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인 것이다.
권씨의 반짝거리는 구두는 그의 발밑에 떨어진 마지막 자존심이다. 그는 열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 있고, 그 중 일곱 개의 구두를 닦아놓고는 매일 하나씩 새로운 구두로 일주일을 보내는 사람이다. 복장은 초라해도 구두만은 반짝이게 하는 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가난하고 옳은 직업이 없이 전전하지만, 그 내면에 들어박힌 자존심은 지키고자 한다. 그것이 반짝거리는 구두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니 가난한 자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자존의식은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다.
강도사건 이후, 권씨는 사라지고 아홉 켤레의 구두만 남게 되었다. 열 켤레 중에서 한 켤레의 구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살림에도 구두만은 지키던 그가, 그야말로 가난의 극에까지 가서는 자존심을 잃지 않았을까? 현실은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물질적 결핍이다. 정신의 높이를 지향하는 자에게, 물질의 결핍으로 인해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것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비극이다. 나는 결국 이 비극적 현실에서 아프게 살아가는 권씨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와 권씨는 모두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지식인은 양심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대중과의 정신적 거리를 얼마간 지닌 계층이다. 그들이 부를 축적하고 반도덕적 행위를 보이는 경우는 드물지만, 지식인은 흔히 관조적 지성이라 비판되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즉 어떤 실상을 비교적 바르게 보고, 판단 또한 옳지만, 그 실상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않는 태도를 지닌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권씨는 그의 과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그 역시도 하층민과 거리를 둔 삶을 살았지만, 인간의 처절한 본성을 본 뒤 시위에 뛰어 들어 고단한 삶이 시작된다. 비록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의 참담함에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런 권씨에 비해 화자인 나는 같은 지식인이면서도 안락한 생활에 젖으려 하고, 관조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권씨의 태도가 화자보다 높은 위상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서술자 나의 자기 반성적 태도이다. 20평짜리 방에 세들어 사는 동안 가난한 이웃들이 이른바 선생댁인 자신에게 보여 준 지나친 선망과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안주처(安住處)를 찾아 그들을 떠난 바 있다. 그러나 전세로 입주한 권씨와 같은 소외되고 가난한 인간에 대하여 연민 어린 관심 이외에는 보여 줄 게 없었던 나의 처지 ― 이것은 작가가 시대의 비극적 현실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방안을 탐색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소설 속의 화자는 학교 교사로서 여러 해에 걸친 셋방살이 끝에 집을 장만하고 방 한 칸을 세 놓는데, 한 노동자 가족이 세들어 온다. 소설은 바로 이 노동자의 비극적 삶에 대한 관찰과 추적으로 진행된다.
대학까지 나온 선량한 소시민인 그는 성남지구(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택지개발이 시작될 무렵, 철거민의 권리를 사서 들어왔으나, 당국의 불합리한 조치로 내집 마련의 꿈이 좌절되자 이에 항거한다. 그는 왜소한 체구의 평범한 소시민이었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찰의 감시의 대상이 된다. 유순하지만 자존심 강한 그를 집주인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는 와중에 그 노동자의 아내가 출산에 임박하여 병원으로 옮겼으나 수술을 해야 할 절박한 처지에 이른다.
집주인의 도움으로 그의 아내는 무사히 출산했으나, 그 사실을 모르는 그는 입원비 마련을 위해 그 집에서 서투른 강도행위를 하고 그날 이후 행방불명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만 자존심은 강한 평범한 소시민이다. 그는 늘 반짝이는 열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 있는데, 그 구두는 스스로의 인간적 위엄을 지켜나가려는 자긍심의 상징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현실에서 철저히 패배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적 위신과 체면을 잃어버리게 된다. 때문에 주인공 권씨는 서투른 강도행각마저 들통난 채, 이제 그의 구겨진 자긍심이 되어버린 아홉 켤레의 구두만 남긴 채 행방불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인물의 좌절을 형상화함으로써 그와 같은 인물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이 소설의 화자인 국민학교 오선생은 소외된 하층민의 삶을 외면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의식의 분열을 보여주는데, 작가는 이러한 중간층의 계급적 속성을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다. 구두의 상징 및 암시적 기법과 현실 묘사의 사실주의 리얼리즘(사실주의)을 융합한 작품으로 산업화·도시화의 그늘에서 소외된 계층의 삶과 소시민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포착한 문제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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