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대하여- 눈은 감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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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눈에 대하여
눈은 우리의 모든 감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인식작용’을 통해 대상을 개념화하는 것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할 때 이러한 인식작용은 주로 ‘봄’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도 눈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봄’은 개념화를 가능하게 하는 인식작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인간만이 ‘봄’을 통해 사유한다. 인식의 전제조건인 ‘봄’이 없었다면, 즉 ‘봄’의 눈이 없었다면, 인간의 모든 사유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인간의 문명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눈의 중요성, 즉 인식작용에 미치는 눈의 영향력은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의 언어에서부터 유추가 가능하다. ‘나는 안다’의 ‘오이다’(oida) 동사가 그 대표적인 예다. 오이다‘동사는 원래 ’나는 본다‘는 의미의 동사 ’에이돈‘(eidon)의 과거형이다. 나는 보았다’는 의미의 과거형 동사이지만 ‘나는 안다’는 현재동사의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이는 보는 순간 ‘나’의 봄이 ‘나’의 ‘앎’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라는 것, 그것은 곧 감각작용이 바로 인식작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중요성만큼이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눈의 위험성이다. 우리가 어떤 새상-그것이 물질적이든 관념적이든 간에-을 인식할 때, 그 대상을 전체로서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항상 이 ‘안다’는 부분에 속하지 않는 ‘알지 못하는’부분에 대한 배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부분밖에 파악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모든 인식작용의 한계다. 언제나 부분만을 파악하면서도 그 부분을 전체라고 규정하는 것이 인식작용의 모순이며, 이러한 모순이야말로 인식작용의 숙명적인 한계인 것이다. “본다는 것 자체는 심연을 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한 니체의 진술도 전체로서 완전하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즉 인간은 끝모를 심연말고는 어떠한 실체도 전체로서 파악할 수 없다는 극도의 니힐리즘을 표현한 것이다.
눈이 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이며, 인식한다는 것은 전체 중의 부분만을 파악하다는 것이기에 눈이란 진정 감옥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부분이라는 틀, 인식의 틀 속에 가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인식의 세계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전체 가운데 부분을 떼어내어 그것을 전체인 것처럼 ‘틀짓는’ 감옥의 세계, 관견의 세계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식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논리적 사유-이성적 담론-는 일면 가장 비철학적이다. 인식의 역사는 감옥의 역사이며, 인간 사유의 역사는 ‘틀짓기’의 역사다. 틀짓기의 역사는 전체를 부분으로 난도질하는 ‘비틀기’의 역사다. 눈이 있고 그 눈이 바라보는 대상이 있는 한, 즉 인식의 주체인 ‘나’가 있고 인식의 대상인 ‘너’가 있는 한 ‘틀짓기’의 역사, ‘비틀기’의 역사는 필연이자 숙명인 것이다. 눈이 본 부분을 전체인 것처럼 절대화하는 인식의 폭력은 실로 오랜 역사를 지닌다. 그것의 역사가 곧 인간의 역사라 하더라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일찍이 그리스 이오니아 학파의 자연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했다. 한편 같은 이오니아 학파의 아낙시만드로스는 우주의 궁극적 물질, 즉 근원은 ‘무한정자’나 ‘카오스’, 곧 ‘혼돈’이라고 했다. 그는 모든 만물은 ‘혼돈’상태인 ‘무한정자’에서 발생하며, 이때 모든 물질의 근원이 되는 ‘무한정자’는 물처럼 지각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라 마치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는 신적 존재처럼 지가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자연철학자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이 공기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기원전 6세기경의 동시대인들이었지만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만물의 근원을 각기 다르게 규정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르게 규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보는 부분적인 현상만을 관찰하고 그러한 관찰의 결과에 입각해서 그 부분적인 현상을 전체인 것처럼 틀짓고 개념화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탈레스와 더불어 시작한 ‘존재론’의 역사는 전체를 부분으로 난도질하고, 부분을 전체인 양 틀짓고, 다시 그 틀을 ‘비트는’ 끝없는개념화의 역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듭된 인식 파편화의 산물이나 다름 없는 것이 숱한 ‘존재로’들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신들에게는 모든 것이 아름답지만, 인간들에게는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옳지 않다.” 인간 사유의 역사는 어느 한 편을 ‘타자화’하고 배척하는 숱한 존재론들 간의 간단없는 갈등과 충돌, 그리고 분란의 역사인 것이다.
이 우주의 절대자,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이라는 개념도 인식 파편화의 산물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사물의 생성, 발전, 그리고 소멸이라는 현상들을 주관하는, 즉 그러한 현상들에 질서와 법칙을 부여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를 가정하고 그 존재를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세기의 한 기독교인 저자에 다르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365명이나 되는 신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신에게 부여할 수 있는 속성이나 개념이 많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들 각각은 독자적이 개념을 요구할 수 있는 독자적인 존재였다.
거칠게 정리한다면, 가공할 만한 천둥과 번개를 ‘보고’이를 제우스의 이름으로 신격화하고 그를 악한 자나 금기를 위반한 자를 다스리는 ‘정의의 신’으로 개념화하거나, 태양을 ‘보고’ 이를 아폴론의 이름으로 신격화하고 그를 신탁과 예언을 내리는 ‘빛의 신’이나 ‘지식의 신’으로 개념화하는 것. 또는 ‘힘 있는 자, 황소’(창세기), 폭풍우, 천둥과 번개를 ‘보고’ 이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신격화하고 그를 거부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는 ‘분노의 신’으로 개념화하고, 인간 예수의 행위를 ‘보고’ 그를 ‘신의 아들’로 신격화하고 십자가 위의 죽음을 통해 절대적인 사랑을 위한 절대적인 자기희생을 보여준 ‘사랑의 신’으로 개념화하는 것. 또 불타를 ‘보고’ 그의 법문을 ‘듣고’ 그를 지존으로 신격화하고 고통으로부터 해탈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쳐준 ‘자비의 신’으로 개념화하는 것 등등 다양한 신적 존재들-그것은이 절대존재로 일컬어지든 절대진리로 일컬어지든 간에-은 이처럼 ‘봄’을 전제로 하는 인간 인식의 파편화에 따른 결과물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역사도 존재론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편을 ‘타자화’하고 배척하는 갈등과 분란의 역사다. 숱한 종교전쟁이 이를 증명하며, 때로는 자신들의 신을 절대존재로 규정하고 이를 이데올로기나 전쟁의 대의로 이용한 것도 종교의 한 역사다. 눈이 ‘본 바’를 개념화하는 인식작용이 없었다면 절대추상체나 절대진리로서의 신이라는 개념은 전혀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체에세 부분을 떼어내어 이를 전체로 틀짓고 절대화하는 인식의 파편화 그리고 파편화를 가져오는 눈의 ‘작란’이 없었다면, 종교분쟁이나 전쟁과 같은 파국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눈은 그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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