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답사 보고서 - 답사를 떠나며, 이행 작가 소개, 시비, 문경새재와 교귀원, 문인답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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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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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답사 보고서
- 목 차 -
1. 답사를 떠나며
2. 이행 작가 소개
3. 시비
4. 문경새재와 교귀원
5. 문인답사 후기
1. 답사를 떠나며
이곳 저곳 문인 답사하기에 좋은 곳이 어디인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 우리들에게 흔히 잘 알려지 문인들의 기념관이나 문학관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꽤 먼 곳에 자리하고 있어 우리지역 학예사에게 여쭤보니 아마 문경새재길을 걷다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얘기만을 듣고 단풍이 아름다운 새재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다가 이행의 교귀원이라는 시비와 마주하게 되었다.
2. 이행
이행(1478년 ~1534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택지(擇之)이다. 호는 용재(容齋). 청학도인(靑鶴道人).어택어수(漁澤漁搜).창택어수(滄澤漁水)이고 시호는 문정(文定)인데, 뒤에 문헌(文獻)으로 개시(改諡)되었다. 1495년(연산군 1)종광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을 거쳐 홍문관교리까지 올랐다. 1504년 감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 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약 7개월) 이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 교리로 등용되고, 이어 부응교로 승진되어 사가독서(賜暇獨書)하였다. 1513년(중종 8) 다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가 이듬 해 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사섬사정(司贍寺正)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신진 사류인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 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趙光祖)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봉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긑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판중추부사로 죄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면서 복관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다. , 영의정 풍성부원군 이기(李)의 동생이다.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외조카이며, 사육신 성삼문은 7촌 재종숙이었다. 신사임당은 그의 당질부이고, 대학자 율곡 이이의 재종조부이다. 김종직의 제자인 최부(崔溥)의 문인이다.
3. 시비
交龜院
交龜名有自
往跡世無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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