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라는 나라를 읽고 - 대한민국의 시선을 참아내고 바라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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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본이라는 나라를 읽고
<대한민국의 시선을 참아내고 바라본 일본>
‘일본이라는 나라’라는 책을 읽은 느낌보다 내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식부터 생각해보았다. 24년간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문화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에 매진하며 자신의 나아가는 길에 인생을 거는 모습들을 주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보여주기 식의 문화일 수도 있지만 몇 번의 방문과 대학교에서의 역사 활동에서 만난 일본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느낀 경험이었다. 이렇듯 나는 일본인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가 않다. 그이유중 하나가 내가 배운 역사 또한 국가에서 검사를 통한 교육이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않은 정보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20살 때 역사 활동을 통해 만난 일본학생은 내게 자신들의 역사교과서와는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부정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역사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였다. 어째서 일본은 이렇게 되었는가? 이 문제에 대한 의문은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조금씩 알아가 보게 되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대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를 이해하려면 메이지유신과 2차대전 두 가지를 충분히 알고 또 계속 알고 있어야 한다. 섬나라라는 한계를 제국주의 로 뛰어넘은 일본은 그 후 확연히 달라졌다. 그리고 2차 대전 전후에는 미국 손바닥에 놓인 후에도 제국주의만큼 확실히 바꿨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군국주의적 침략적 속성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다. 여러 개의 섬으로 나뉜 일본의 역사는 1868년의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각 지역에 할거한 봉건 영주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과 반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봉건 영주는 농민을 무력으로 지배하기 위해 무장한 가신집단을 양성했는데, 이 가신들이 사무라이 이고, 이들이 지녔던 칼이 소위 ‘일본도’이며, 이 같은 봉건 지배 체제를 합리화시킨 이데올로기가 바로 무사도이다. 무사도는 12세기에 시작되었으며, 후에 유교 의 이데올로기로 정착되었다.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이 가장 즐겨 보는 고전 연극 ‘가부끼’은 주군에 대한 사무라이의 충성, 복수, 희생 등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패배한 영주를 따라 집단적으로 할복자살을 하거나 수십 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면서 원수를 갚는 ‘용맹한 사무라이’들이 무수히 많았다. 무사도는 사무라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일본인의 정신으로까지 확산되었다. 2차 대전 때 총과 비행기와 대포를 가진 일본 장교들이 일본도를 절그럭거리고 다닌 일이나 전투에서 패배할 때 전원 옥쇄한 행동은 바로 무사도에 근거한 것이다. 마지막 봉건 왕조인 덕천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적 국가가 출현하면서 무사들은 칼 휴대를 금지 당했고 봉건 영주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무사도는 천황제 근대 국가의 군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제는 자급자족적 봉건 경제 대신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물질적 조건 위에 무사도가 접목된 것이다. 일본의 봉건 지배 계급은 서구 열강의 위협에 의해 문호를 개방한 후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시민 혁명을 통해 봉건 지배 계급을 타도하고 자본주의를 확립한 유럽과는 달리, 봉건 지배층이 산업 발전을 주도한 일본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싹틀 수 없었다. 시민 정부 대신에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천황제가 유지되었으며, 의회는 매우 제한적인 권한밖에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천황제 근대 국가의 군대는 신식 무기와 함께 봉건적 무사도로 무장하고, 봉건 영주들의 내전 대신에 ‘대일본 제국과 천황 폐 하’를 위한 대외 침략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는 동시에 제국주의적 대외 침략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은 독일 제국의 경우와 동일한 것이다. 경제적 권력은 천황제 국가의 비호를 받는 소수 재벌에게 집중되었으며 정치적 권력은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군부 지배층과 관료들에게 독점되었다. 일본의 민중은 대부분 민주주의라는 개념조차 인식하지 못하였으며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2차 대전에서의 패배는 일순간에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았다. ‘도오조히데끼’ 를 비롯한 군부 관료 집단은 전쟁 범죄자로 체포되었고 천황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이 똑같은 인간임을 시인해야 했다. 백전백승하는 대일본 제국의 영광을 물거품처럼 꺼져 버렸고 군대와 재벌은 해체되었다. 어제의 지배자들은 민중의 저주를 받았고 산업 시설은 파괴되어 남은 것은 원자 폭탄의 악몽과 전쟁의 폐허뿐이었다. 연합국은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군대를 보위하지 못한다는 평화헌법을 받아드리게 했다. 이제 낡은 ‘대일본 제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그런데 전후의 동서 냉전이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았다. 이른바 ‘전후 역코스’가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대륙에서 장개석 군대가 패주를 거듭하고 동유럽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공산당과 사회당 등 좌익이 주도하는 총파업과 혁명 운동이 불붙어 오르자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의 반공 기지’, ‘미국의 동아시아 대리인’으로 키울 결심을 굳혔다. 맥아더 원수의 미 점령군 사령부는 1948년말 전범 재판에서 도오조를 비롯한 7명을 교수형에, 16명을 종신형에 처하는 것으로 전범자 처벌을 마감했다. 천황제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미국의 후원을 받은 요시다 시게루가 수상에 취임했으며 좌익은 다시 탄압에 직면했다. 게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한 다음에는 과거 전쟁 범죄자들이 모두 사면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직에서 추방되었던 1만여 명 이상의 주모자급 전범들이 모두 공직으로 돌아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교육의 각 분야를 신속하게 장악했다. 해체되었던 재벌 기업들도 재편성되어 살아났다. 경찰 예비대가 창설되었고 1954년에는 자위대가 발족함으로써 일본은 실질적인 재무장 을 갖추었다. 미국은 군국주의자, 제국주의자, 국수주의자, 파시스트, 천황제의 광신자들을 동맹자로 선택하여 그들에게 일본의 정치권력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부활의 음모를 싹틔우기 시작했다. 일본에서의 이러한 사태 진전은 독일의 경우와 비교할 때 엄청난 차이가 있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대가로 미 · 소에 의해 분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범죄 행위의 조사, 원인 규명과 제거 작업이 철저히 이루어져,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보듯 거의 모든 전쟁 범죄자들이 철저하게 단죄되었으며, 특히 동독에서는 협력자까지 완전히 숙청당하였다. 서독의 경우에는 협력자만은 살아남았지만 권력의 핵심으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그야말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어 오늘날에는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군국주의 사상의 부활이 현실로 드러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만년 여당인 집권 자민당 정권은 60년대에 메이지 유신 1백 주년 기념제를 성대하게 거행하고, 침략 전쟁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대규모의 예산을 배당하였으며, 국민 세뇌를 위한 천황의 ‘교육 칙어’를 부활시키려 애쓰고, 냉전사상을 국민들 사이에 퍼뜨리는 데 열을 올렸다. 군사 대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자기네의 욕망을 국민적 욕구로 조작해 내기 위해 힘쓴 것이다.
역사 속 한일관계를 두루 살펴보면 대한민국과 일본은 어떤 방식으로든 교류해왔던 이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람은 일본을 ‘믿을 수 없는’ 이웃으로 여길 뿐이지 손을 내밀 수 있는 즐거운 이웃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이웃이라고 하기 에는 조금 가깝고도 먼 우리나라와 일본은 늘 긴장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으며, 이 같은 긴장 관계를 조금이라도 바꾸어가기 위해서는 현대 일본을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일본이라는 나라’ 가 의미 있는 대답을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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