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감상문 기독교와 신도주의의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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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신도주의의의 대결
[일제강점기 동안 나타난 한국교회의 신앙적 대처를 고찰하라]
한국교회의 역사
일본의 기독교는 타협하여 신도 군국주의에게 완전히 항복되었다. 한국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로부터 제 2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던 해인 1945년까지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신사참배를 강요당하게 되었고, 한국교회 역시 기독교와 신도국수적 민족주의와의 충돌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보다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적 현상으로 더 격렬한 저항을 감행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일제의 박해는 다양했으나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신사참배강요였다. 한국교회는 일본교회와 동일하게 신사참배에 대해 단합된 자세로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야합적인 자세를 지니게 되었다.
신사란 무엇인가?
신사란 신도라는 종교의식을 행하는 곳인데 신도란 일본의 토착적인 원시종교를 의미한다. 이것은 다신론적이며 자연숭배적인 일본 고래의 종교이다. 여기에다 일본인은 국조신이라고 하는 천조대신과 그 이후의 종신을 섬기며, 또 천황을 현인신으로 섬기는 일종의 민족종교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명치유신에 의해 새로 성립한 정권은 천황제 국가로써 신도를 기본이념으로 하였다. 그리고 신도를 국가적 종교로 전 국민에게 참배토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에 보은하는 국민도덕’이라 고 규정하였다. 신사참배를 국가적 의식으로 강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도라는 종교적 성격을 ‘비종교화’ 한 것이다.
신사참배가 처음부터 강요된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일본에서 군국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자 소위 국민정신 통일이라는 취지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이 강요는 기독교회를 분열시키고 그 힘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강요되었다. 기독교회는 처음부터 강하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천주교회와 감리교회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 강욜ㄹ 수용하였고 끝까지 저항하던 장로교회도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일제에 굴복하였다. 일부의 그리스도인들은 끝가지 거부하였으나 많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
교육에 대한 탄압
불의한 권력은 항상 교육을 자신의 권한 아래에 통제하려고 한다. 특히 학교에 대해 가열 찬 핍박을 퍼부었다.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교회 형성기에 있어서, 기독교 학교는 신자들의 협조와 도움을 받아 운영되었다. 일제는 1911년 교육 칙령을 발표하여 사립 학교를 일제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였다. 일정한 기준을 맞추어서 인준을 받지 못한 학교는 폐교하겠다고 공포하였다. 천황초상화 숭배, 신사참배, 죽은 자들(영웅)에 대한 기도, 궁성요배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강제 행위가 자행되었다. 본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훌륭하고 설량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신사참배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하여 천황교육칙어의 원리에 따른다면 학교가 천황교육칙어의 원리 하에서 설립되었기 때문에 학교는 반드시 신사참배를 참여해야한다. 천황교육칙어는 신도 일본의 선량하고 훌륭한 시민이 되게 하는 것을 교육의 제일 목표로 선포했다.
대부분의 사립학교들은 재정적으로 열악했기 때문에 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특별히 일제는 성경과 한국역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특히 성경교육이 문제가 되었다. 대다수의 기독교 사립학교들은 성경교육이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감리교는 성경 교육이 없어도 기독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고 일제의 요구에 순응하였지만, 상당수의 장로교 학교는 성경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신사참배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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