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바다의 도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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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도시 이야기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이탈리아 북부에 살았던 일단의 사람들이 북쪽에서 쏟아지는 야만족들을 피해서 석호 위에 도시를 만들고 살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베네치아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중세를 치열하게 살아온 국가였다.
이들도 사람이 살아가는 터를 다지고 자신들만의 정체를 세우는데 거의 500년의 시간을 보냈고 11세기 이후 지중해 최대 교역국으로 발돋움하고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면서 번영을 구가하다가 18세기말에 나폴레옹의 손 아래 스러져갔다.
최초로 상주 대사 제도를 운용한 베네치아는 외교의 달인이었고 유럽 지역의 정보통이었다. 능수능란한 외교와 합리적인 경제활동에 힘입어 대항해 시대의 도래에 따른 경제적 난관도 잘 넘기고 막대한 부를 축적한 국가이다. 터키와의 관계에서는 도저히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기에 그런 경우는 무력 대응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치에 있어서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엄격하게 시행하여 국가도 국민도 감정에 치우쳐 일을 처리하기 보다는 실리를 따져서 판단 행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고 공동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한 자유를 특히 언론에 있어서 자유를 허용했기에 학문과 예술의 성공도 맛보았다.
하지만 베네치아도 17세기 이후 변해버린 게임의 법칙을 따라가지 못했다. 전제군주국가들의 대두로 전쟁의 규모가 커져버렸고 세밀히 계산한 뒤에 실리를 따져서 개전하기 보다는 영토의 확장만 이루어진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은 그런 혼란의 시대에 상대에게서 이성적인 판단을 이끌어 내고자 했으니 아무것도 될 리가 없었다. 더구나 마지막 순간에는 정보도 부족했고 판단력도 흐려졌고 나폴레옹에 대응할 용기도 없었다.
로마사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이야기가 방벽과 군단에 관한 이야기라면 베네치아에서는 해상보급로 확보와 외교다. 베네치아 외교의 기본이 실리 추구였기 때문에 대의명분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기독교 국가에서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일관한 이교도들과도 로마 교황청에서 싫어한 개신교도들과도 교역을 하고 인적 교류도 활발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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