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사기열전의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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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의 사마천
사기열전이 쓰여지고 난 뒤 2천년 동안 중국의 모든 역사서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힌 역사서라는 타이틀은 거짓임 아니라는 것은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사기의 큰 특징인 사마천만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풍자, 논리 정연한 전개를 통한 그의 문학성은 굳이 다른 정보매체를 통해 듣지 않아도 책 속에서 확연히 들어난다. 그의 문학성은 누구나 찬미하는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역사서답지 않게 인물의 심리를 생동감 있게 말하는 사마천의 문학적 감수정과 소질에 있다. 사마천의 명성은 역사가로서보다는 문학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더 높이 평가 된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사기열전의 문학성은 역사서의 새로운 길을 창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저서가 역사서의 면모를 띄지 못하는 한낱 역사 소설이라는 것은 아니다. 사기는 역사서로서의 방대한 사료와 사마천 자신의 깊은 학식이 더해져 객관적 역사의 저술을 해왔고, 그에 사회의 모습을 냉철하게 비판해 그 가치가 높다. 이런 사기열전의 위상이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의 상황과 그의 사상 등의 영향을 어떻게 받아는 지와 그것을 드러내는 사마천만의 저술방법을 본론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사기열전은 <본기(本紀)>(12권), <서(書)>(8권), <표(表)>(10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의 5편(부)으로 구성된 13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이다. 저술가인 사마천, 자신은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태사령 사마천의 저서라는 뜻이다. [사기]란 중국 삼국 시대 이후부터 지어진 이름이다. 역사가들의 역사서술은 대개 단편적인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연월별로 배열한 사실기록이며 일정한 체계로 되어 있어 규모를 정한 후에 각종 자료를 취사하여 구사한 것은 종전에는 없었다. 사마천은 자서에서 “나는 과거의 사적을 이은바‘기술하고’, 세전되는 문헌을 정리하는 것이지 ‘지어내는’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사마천은 정리의 필요성을 인식하였고 그 정리로써 자기의 이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학계의 으뜸가는 창작가였다. 차별화된 역사서인 사기는 인물 중심의 역사기록, 역사의 완전한 개념 정립, 복잡한 서술체계와 상호연관성을 띠고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실로 창조적이지 않을 수 없다.
사마천은 사기열전 속에 역사적 인물의 행위, 언어 심지어는 인물의 정신, 용모까지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이런 인물들은 모든 일정한 계급과 계층에 속하였는데 어떤 인물들은 이야기 식의 방법으로 실록(實錄)하였으며 묘사와 서술에 있어서 애증이 분명한 뜨거운 감정이 주입되고 저자의 견해와 염원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므로 사기에는 생동하는 인물 형상이 많다. 또한 그러한 면을 사마천의 주관에 맞추어 서술하여 인물을 평가하고 있다. 그의 평가는 그가 바라본 사회의 모습이며 비판적 목소리를 간접적으로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볼 때 사기는 사마천의 사상을 면밀히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자신의 생몰 연대를 써 놓지 않아 정확한 날을 알 길이 없으나 다만 일반적으로 B.C. 145년경인 한제국 효경제 때에 태어나 효소제 시대에 죽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니까 사마천이 실질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앞의 두 황제 사이에서 54년 간 재위한 효무제 시대인 것이 분명해진다. 이 효무제가 세상을 지배하던 재위 54년간은 중국사 중에서도 가장 활기차고 빛나던 시대로 일컬어진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사상. 문학 등에서 그 동안 축적돼 온 중국인의 저력이 일시에 폭발되는 문예부흥기로 말해진다. 이 시기에 사마천은 활발히 활동하였고 이 문학부흥기에 탄생한 한 천재 역사가였다. 하지만 사기의 시발점은 남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데,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천의 유언인 ‘자신이 사관자리에 있으면서 이루고자 했던 역사의 족적을 기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런 약조를 한 것이 그이 나이 36이었다.
사마천은 역사가이지만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여러 문헌을 보고 그의 생물연대나 사상을 추측할 뿐이다. 그의 책속에 묻어나는 뛰어난 문학성이 아니라도 사기가 찬미를 받는 것은 인간 본능에 대한 통찰력에 있다. 사마천의 풍부한 인생경험과 특이한 인생역정 그리고 다양한 견문과 박학다식함 등이 이루어져 가능했던 그 통찰력은 우리가 사기열전에 빠지는 또 다른 이유이다. 사마천의 견문은 [태사공자서]에 자신의 여행기를 간략히 기록 해 두었다. ‘ 스무 살이 되어 남쪽으로 강(江), 회(淮)를 두루 다녔고, 회계산(淮稽山)에 올라보고 우혈(禹穴)을 탐방하였으며......공자의 유풍(遺風)을 보았다.....양(梁)과 초(楚)를 지나 돌아왔다.’ 이 장대한 역정은 사기를 저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 그의 저술에 영향을 미친 것은 궁형(宮形 : 생식기를 거세하는 형벌)선고는 그가 얼마나 사기열전에 열정을, 아니 생애를 바쳤는지 단편적으로나 보여주는 사건이다. 남자로서 최악의 형벌인 궁형(宮刑)을 치욕 속에서도 견뎌 딛고 일어섬으로써 그는 그의 저서에서 보여주듯 내외적인 고통에 시달렸을 인생의 낙오자나 실패자 심지어는 장애자에 대해 유달리 관심이 많았다. 백이(伯夷)와 숙제(叔弟), 공자(孔子), 항우(項羽), 한비자(韓非子)등의 인물들에 대한 사마천의 진한 애정과 깊은 동정심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이렇듯 그의 저서, 사기열전에는 그가 묻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마천은 음란하고 포악한 제왕들의 작태를 밝힘으로 군주가 가져야할 모습을 되집었고, 집단 내부의 첨예한 모순과 그들 사이의 아귀다툼을 진실하게 반영함으로써 지배자가 가져야할 도(道)를 말하고, 중하층의 사람들의 우수한 품성, 용감한 영웅적 행위를 찬양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귀감이 되게 하였다. 또 사회 현실의 암흑상을 폭로하고 인민들의 고통을 반영하였으며 나아가 농민봉기의 영수를 구기한 것은 그가 얼마나 진보적이었는지 보여준다. 허나 사기열전 책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본보기가 다가 아니다. 사기열전에서, 그리고 사마천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본보기는 사마천 자신이다. 궁형(宮刑)을 당하면 주위의 멸시와 고욕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사기열전의 저술 위해 영광스런 자살 대신 삶을 택하는 모습에서 그의 책에 대한 감탄사를 내뱉기 전에 그의 험난했던 인생 여정과 그것을 뛰어넘은 그의 열정과 용기에 대해서 잠시라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그가 후대 자손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불의에 맞서는 용기나 영웅들의 용맹함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길을 보면서 우리 역시 자신의 일에 열정과 최선을 다하며, 그 일의 가치를 자신이 깨달아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누구의 말이나 눈치에 의해 일을 선택하고 종사는 게 당연시 여기는 현대사회에 좋은 귀감이 되는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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