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고지훈의 《건국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 엘리트와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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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지훈의 《건국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 엘리트와 민중》을 읽고
매년 8월 15일 광복절, 우리는 일제 강점으로부터의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한다. 그런데 최근 일각에서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꿔 명명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1945년 해방에서부터 정부 수립까지의 시기를 국토를 분열시키는 이념 대립의 장으로 보고, 특히 한반도가 공산주의화 될 위기의 시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것을 제헌헌법의 정신으로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건국’이란 나라를 세운다는 뜻인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본다면 일제 강점기와 대한 제국, 조선 등 그 이전의 나라와 민족은 우리가 이어받은 역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나라의 정체성에는 일제 강점기 하에서 치열하게 목숨을 희생한 독립 운동가들도, 단군왕검도, 역사 전통도 없는 것이다. 건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 논문의 제목처럼 분명하게 나뉜다. 건국절을 주장하는 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한 다수 민중의 시선으로 보면 건국의 의미는 이미 개천절에 담겨 있으며 일제암흑기동안 잃었던 나라를 찾은 광복에 이미 국가 정체성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보는 엘리트의 시선과 민중의 시선은 건국절 논란에서 나눠지는 시각의 차이와 일맥상통한다. 건국절을 지지하는 엘리트의 시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건국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대내외적으로 떳떳이 알릴 수 있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승만 정부나 초기 집권 계층에게 정당성을 부여하여 국가 기관의 폭력이나 친일 행위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닌다.
한국의 역사는 일본제국주의의 강제 점령부터 시작하여 분단과 전쟁, 그리고 초헌법적인 독재 정권까지 겪으며 이념 간, 계층 간, 권력 간 날카로운 대립과 분열이 계속되었다. 이 글은 주로 대다수 민중이 피지배자, 피해자로서 받은 역사의 상처와 폭력, 아픔을 그대로 담아낸 구술사의 성과와, 그것을 현대사의 재해석이라고 불리는 대립적인 시각과 대비하여 보여주고 있다. ‘현대사의 재해석’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여러 활동들은 ‘건국’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광복절의 의미까지 건국절로 치환하려 한다. 진정성 없는 형식적인 겉보기에 우리가 두고두고 반성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하는 것을 놓치고 외면해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변함없이 주지해야 할 사실은 아무리 새로운 역사적 평가로 포장하여도 반민족행위나 독재적인 권력의 남용은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문의 구술 사료를 보면 분명 같은 시기인데도 엘리트 즉 권력 계층이 남긴 자료와 다수 민중이 남긴 자료는 마치 전혀 다른 시기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소수 엘리트들이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을 때, 정작 거기에 중심적으로 참여해야 했던 대다수 힘없는 민중들은 경찰, 청년단체 등 국가 권력의 폭력적 횡포에 억압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그러했던 역사를 지배층의 입장이 아닌, 민중의 입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구술사를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 본다. 나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이자면, 고등학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배울 때에도 교과서에 본문으로 서술되어 있는 텍스트보다 그 아래에 첨부 자료로 덧붙여 놓은 구술 자료나 기록물을 더욱 흥미롭게 읽곤 했다. 거기에는 대부분 민중의 목소리를 실었다. 공식적인 역사적 기록에 있어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지배 권력층은 굳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겐 때로는 객관적으로 서술되어있는 사실들보다 그 자료들이 더욱 생생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그런 자료들을 읽어 보면서 ‘이렇게 밝히지도 못한 억울한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기도 하였다. ‘구술 자료’의 중요성을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먼저 그것은 진실되고 ‘솔직한’ 역사를 말해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역사가들이 멀리 떨어져서 역사의 행위자들을 연구할 때, 행위자들의 견해나 행위, 삶에 대한 역사가들의 성격 규정은 잘못 묘사되거나, 역사가 자신이 경험한 것과 상상한 것의 투사, 즉 학문적 형태의 픽션이 첨가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구술 자료는 연구의 대상을 주체로 변형시킴으로써, 역사를 단지 더 풍부하고 더 생생한 것이 아니라 더 진실 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구술 자료’의 중요성을 기록 자료와 비교하여 말하자면, 국가기구가 기록으로 남기는 여러 자료나 통계 수치는 구술 자료에 비해 피상적이고 선택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1948년 치러진 510 선거를 들 수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성별과 신앙을 묻지 않고 21세 이상의 성인에게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진 남한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였다. 하지만 그것은 일면적인 사실일 뿐, 선거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민주주의적 선거라고 하기 어렵다. 또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였기에 다수 민중의 호감을 사기가 어려웠다. 후보들의 경합에 있어서도 이념적 다양성이 존재하기 보다는 소수 엘리트들만의 선거였다고 할 수 있다. 김구, 김규식, 홍명희 등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의 남한 총선거안이 통과되자, 남한만의 선거를 국토를 분단시키는 것이라 보고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며 선거 참여를 거부하였다. 그런데도 선거 결과는 오히려 이승만과 한민당에게 불리하였다.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 상황에서 그들에게 비판적인 무소속 의원도 정당 의석을 다수 차지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글쓴이가 민중의 구술 자료에 중요한 가치를 둔 것은 좀 더 다양하고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역사를 바라보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런 의도를 위해 당시의 국민을 ‘엘리트’아니면 ‘민중’으로 교집합 없이 두 집단으로 분절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문제시해야 할 것은 정부 수립 그 자체의 정당성이기 보다, 이승만 정부의 비민주적인 행보일 것이다.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이 국가로서의 기본적 틀을 잡아가는 과정도 이념적, 계층적 다양성이 부족한 상태의 일부 엘리트 중심이었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단지 형식이나 절차로만 인식한다면 입헌적 절차나 법률, 선언과 관련 있는 소수 엘리트의 역할은 강조되고 민중은 그 엘리트들이 대상화하는 객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초기의 형식적 절차를 민주주의라고 제한적으로 한정하는 것은 건국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기득권층에게는 더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 구술 사료를 통해서 가늠하기조차 힘든 당시의 민중 삶의 실상을 생생히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비롯해 몇몇 문학 작품을 통해 그 당시 혼란스러웠던 무질서를 상상해볼 순 있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경찰을 ‘산골대통령’, 심지어 ‘개’라고 부를 정도로 잔인했던 그 당시 순사들의 행태를 알게 된 것도 이 논문에 수록된 구술 기록 덕분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국민방위군 사건이 있다. 대규모의 국민 유기사태라고 칭하는 이 사건은 전방이 아니라 후방에서 제대로 된 국가의 사후조치를 받지 못해 영양실조, 추위, 전염병 등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이다. 동원된 인원 대부분이 군사적 목적으로 소집되었으니 옷이나 식량 문제는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여 간단한 옷차림으로 집합했던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 질 의무가 있는 국가가 저지른 이 사건은 아직도 희생자의 규모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미제 사건이라고 한다. 이념 논쟁에서 가장 큰 피해와 상처를 입은 사람은 정작 이념과 가장 거리가 먼 일반 국민들이었다. 또 다른 대표적 사건으로 보도연맹 사건을 들 수 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 고안해낸 좌익 포섭단체였지만,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의 위기의식 때문에 이념에 관계없이, 의사에 관계없이 가입한 수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공산당이 뿌리고 간 전단을 주워 담배를 말아 쓰는 일로도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고, 한 지역에 인민군, 국군이 주둔할 때마다 번갈아가며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가능했던 것은 법조차 정부의 무질서를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정적을 제거하는 데 활용되었던 국가보안법, 한국전쟁 중 벌어진 대규모 학살의 법적 근거였던 비상조치령, 계엄령과 같은 법규들이 국민을 함부로 죽여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였던 당대의 사람들. 그만큼 사회가 격변과 혼란의 도가니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 엘리트와 권력층, 우파세력 등이 건국 과정에서 경찰, 사설 무력단체들이 헌법과 건국이념을 외면한 채 폭력으로 해결하도록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방위군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수 국가 엘리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보여주기 보다는 자기 가족의 목숨부터 지키고 이후 남은 사람들이 겪게 될 고통은 생각지 않는 노골적인 이기주의를 보였다. 북한이 서울을 수복하기 전,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하며 국민들에게 확신을 주었지만 이미 정부는 부산 지방으로 옮긴 지 오래였던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민중이 바라보는 민주주의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우파 계열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국민의 기본권을 포함하여 민주주의 정치제도 자체가 유보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었’다면, 왜 정부 수립 이후로부터 10년, 20년, 30년이 지나서까지 김지하나 김수영 같은 참여 시인들이 감옥에 끌려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그렇게 고군분투하였는지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구술사가 특히 생활 문화사, 혹은 개인의 삶에 초점을 두기에 당시의 가해자 측에서 보면 민중에 의해 얻어진 주관적 역사 기록물의 사실성이나 객관성을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 기관이 남긴 공식 기록조차 공공연한 조작과 왜곡이 난무하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가해자의 자리에 있던 이들이 확실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떼쓰는 것은 권력층의 기만이다. 게다가 수많은 짚들이 모여 하나의 새끼줄을 만들듯이 하나 둘 씩 모인 민중의 구술사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을 형성한다면 그것은 그 어떤 역사적 자료보다 진실하고 생생한 사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엘리트와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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