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성찰 - 이념과 목적 - 유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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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삶에 대한 성찰 - 이념과 목적>
삶에 대한 성찰 이란 주제를 받았을 때 크게 당황했다. 무엇보다 익숙하지가 않았고 이런 종류의 글을 써본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5/14 수업이 끝난 후 교수님께 레포트 에 관해 물어 보았을 때 교수님은 이 주제의 답은 없고 부담 없이 내가 나이도 적은 것이 아니니 한번쯤은 나의 인생을 되돌아 보는 것이 좋을 꺼 라고 하시면서 부담없이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쓸 것을 조언해 주셨고 그로 인해 나는 한 층 부담없이 레포트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지난 25년간 나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폐에 2개의 구멍이 뚤려 부모님과 떨어져 지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 유년시절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은거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코 귀 편도선 등을 수술했던 기억이 난다. 한 학기 정도를 한양대 병원에서 살았다. 학교 친구들 보다 간호사 누나들 보는 시간이 많았고, 밥 보다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은 기억이 난다 (수술후 부은 부분을 가라 앉혀야 한다는 명목아래) 처음에는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괴로웠다. 입에 시원한 물질이 들어가는것 조차 싫어했었으니깐. 그 때 당시 수술실에서 의사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우리들은 아프게 안할꺼야 한번 눈감아 볼래 . 그리고 나는 눈을 감았고 깊은 수면에 빠진 후 다음날 눈을 뜬 기억이 난다. 평소에 내시경을 많이 했기에 의사 가운만 입은 사람들을 보는거 자체가 싫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한쪽 콧구멍을 사용하지 못했었던거 같다.
몸이 자주 아파 내성적인 학교생활을 할 줄 알았던 주위의 시선과는 달리 초등학교를 활발하게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공 차는걸 좋아했었고, 같이 오락실가는걸 좋아했다. 전직 초등학교 교사 이셨던 어머니의 주관으로 나의 친구들 10 명과 같이 주 1회 우리집에서 독서토론을 했던 기억도 난다. 당시 서울 에 살았을 때 우리집은 이사를 매우 많이 다녔었다. 1년에 1번 정도 다닌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직장으로 인하여 우리 가족은 모두 대전으로 이사오게 된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대덕초등학교로 전학오게 된다. 대덕초등학교 . 서울에 있을때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친구들과 노는것 에만 관심이 있던 나는 이 곳 학교 얘들의 영어실력을 보고 깜짝놀랐다. 당시 나는 ABCDE 알파벳 조차 몰랐으며 쉬는 시간에 영어 원문 소설을 보는 아이들이 신기했었고 다른 나라에 온거 같은 착각도 가끔가다 느꼈다. 학교 주위엔 오락실도 없었고 만화 대여점도 없어서 나의 초등학생 시절을 더욱 우울하게 보냈던거 같다. 우리 어머니도 그 쪽 학교 어머니들과 같이 다니시더니 나의 공부에 대해 서울에 있을 때 보다 더 극성으로 변하신거 같았다. 그런 어머니가 솔직히 섭섭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다 내가 잘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신것이었지만 , 그 때 당시에는 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거 같아서 어머니와 자주 싸웠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졸업후 중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1학년 까지도 나는 공부와 담을 쌓고 지냈다. 그리고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2학년 때부터 인문계 실업계 고등학교 로 갈리는 내신 성적이 실질적으로 반영된다는 말에, 2학년 때부터 내 자의에 의해서 스스로 공부를 했다. 중간고사 결과 내 성적은 40명 중 에 10등이었다. 중학교 1 학년 때 40명 중 35등을 왔다 갔다 했던 것에 비하면 크게 오른 성적이었다. 순간 나도 마음먹고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꺼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때부터 나의 성적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고 비록 5등 내엔 못들었지만 40명 중 7등까지 하며 나름대로 성적에 대해 만족하였다. 평이한 성적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무사히 진학하게 된 나는 고등학교 초반 굉장히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주위에 있는 얘들은 내신 점수 평균 90이 넘는데 나는 거의 80점 초반대 에서 왔다갔다 하였고, 그렇다고 모의고사를 그렇게 잘 보는 것 도 아니었다. 모의고사 점수는 400점 만점에서 200점을 왔다갔다 했으며, 내신이나 모의고사에서 계속 만족스러운 점수를 얻지 못하자 계속 좌절했던 기억이 난다. 공부를 해도 모의고사는 절대 안 오르는 것 같았다. 고 2때까지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다가 고3 여름방학 때부터 모의고사 성적이 조금씩 올랐고, 수능 때 점수가 평소 모의고사 때 보다 잘 나와 공주대학교 문화재 보존 과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화재 보존 과학과 입학 후 아름다운 대학생활을 기대했던 것 과 달리, 선 후배 간의 예의 와 학과 내의 규칙들, 그리고 각종 과 생활들로 인하여 지친 하루를 보내며 방황하였다. 매일 술을 먹었고, 학교 수업엔 들어가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목적없는 삶을 산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당시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당시 나는 목적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공부도 해보지도 노력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마냥 어렵다고 생각하여 책을 보지도 않았고, 대전에서 공주로 통학하는 것이 힘들어서 학교에 제대로 나가지도 않았던 기억이난다. 결국 나는 학사경고를 받게 되었고, 다음 학기 자퇴를 하느냐 마느냐의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일단 이 상태로 학교를 다시 다닌다는 것은 돈을 버리는 거나 다를바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반수를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다시 수능공부를 할 자신도 없었다. 수 많은 고민과 부모님 과의 대화를 통해 나온 결과는 휴학 후 미국에 잠시 있은 후에 군대를 다녀 오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생각이 트이길 바라셨다. 나는 국제워크캠프라는 단체를 통해 미국 ACE(America Conservation Experience) 라는 단체로 들어가서 약 4개월 동안 있었는데 그 단체에는 약 60명 정도의 전 세계인 들이 있었다. 미국인부터 시작하여 태국인 까지 다양한 나라의 사람이 있었고, 8명이 한 팀이 되어 8박9일 간 미국 내 그랜드 캐년 등 유명 국립공원에 들어가 생활하며 국립공원 측에서 필요한 일을 해주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이었다. 처음 2주간은 굉장히 힘들었다. 국립공원에 캠프를 가는데 영어를 못해서 국립공원 담당자와 커뮤니케이션이 안되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2주 후 부터는 조금씩 귀가 열렸고 , 영어를 못해 가만히 있는 것 보단 차라리 못하더라고 조금씩 알아가는게 더 좋을꺼 같다는 생각이 들어 외국인과 말도 안되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단체속에서 나는 사람은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고, 아무리 언어가 달라도 마음을 열고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그도 나에게 마음을 열 확률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방이 아무리 나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내가 마음을 열고 웃음과 미소 그리고 진심으로 다가간다면 결국엔 상대방도 나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을 깨닫는 20살의 소중한 교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다른 20살 내 또래 친구들이 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나는 미국에 가서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비록 그들보다 1학기에서 1년 정도 늦게 졸업하게 되었지만 나는 내가 미국에서 이러한 경험들을 한 것에 대해 절대로 아깝지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돈 버리면서 학교 다니는 것 보단 , 다양한 나라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 사이에서 살아 나가는 방법을 터득한게 오히려 당시 160만원의 등록금 보다 더 갚지다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6년 3월 군입대를 하게 됬다.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여 전남 장성 육군 기계화 학교에서 훈련받은 후 강원도 고성에 22사단 55연대로 배치되었다. 처음에 공용화기병 (Metis-M)의 임무를 수행했으나 우리 부대에 탈영과 휴가 미복귀 등 이등병들의 고충이 많은 부대로 소문이 나자 연대장은 이등병들이 백일휴가 가기 전 4박 5일동안 부대에서 교육을 시킨 후에 휴가를 내보내게 되었는데, 그 교육담당병에 내가 선발되어 남은 10개월 군생활 동안 관심병사 (군 생활 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있는 병사들)들과 상담을 하고 백일휴가 교육을 진행하였다. 상담을 하면서 느낀건데 일단 해당 당사자가 말을 하다보면 그 사람의 문제와 해결책을 알게 된다. 가만히 듣고있는 건만으로도 상대방의 마음이 불안에서 안정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이등병들이나 일병이 왜 군 생활에 힘들어 할까? 고참들의 압박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없기에 이러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보았고, 나도 타인과의 문제가 생겼을 때 그의 문제를 끝까지 잘 경청해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군 생활을 마친 후 2008년 3월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했다. 일단 신입생 때 학사경고를 받은 성적부터 되돌려 놓고 싶었다. 처음에 솔직히 힘들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모든게 다 생소해보였다. 학교 복학해서 제일 스트레스를 받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성적이 안 나오면 어쩌나 굉장히 초조한 마음과 불안감 때문에 시험기간 때 담배 피는 양이 한갑 반으로 들었었다. 1학기 가 끝난후 성적이 나왔다. 결과는 예상 외 였고, 대 만족이었다. 4.0 이 넘은것이었다. 정말 의외였다. 어떻게 내가 4.0을 넘을 수 있지. 나 자신도 믿기지 않았다. 그 때부터 대학교 공부에 대해 자신감을 조금 가지게 된거 같다. 사람의 모든 것은 마음가짐으로부터 시작된다. 공부하기 전, 책의 내용을 보고 아 이거 다 할 수 있을까? 이거 어렵겠는데 라고 생각될때마다 나는 이 단어를 머릿속에 되네인다 “해봤어요?” 우리가 막상 해보지도 않고 겁을 내는 일들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은거 같다.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 시작하면 안될일도 되지만, 마음이 불안전하고 초조한 상태에서 시작한다면 될 일도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공부하기 전 마음의 불안감을 극복(?) 하고 공부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잘 안되고 어려울때마다 남들도 거의 나와 비슷한 부분에서 어려움과 고충을 느낄거라고 생각하며, 그래도 이걸 조금이라도 더 봐야 내가 나중에 공부하기 편해진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한번 그 부분을 본다. 남자는 책임감과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임감, 학생으로서의 책음은 무엇인가. 학교생활에 충실히 하며 학점관리, 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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