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 제주사(史)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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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史) 답사기
오늘 우리가 방문한 곳은 관덕정과 항몽유적지, 모충사, 별도봉 일본군 갱도진지, 곤흘동, 조천만세동산, 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은 제주의 시대별 역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제주도의 유적지 들이다. 답사를 통해 둘러본 일부 장소는 나뿐만 아니라 제주에서 초등학생 때나 중학생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가보았던 곳이기에 새로움보다는 뭐 특별할 것이 있겠나 싶을 정도의 “아... 또 가?” 이정도의 반응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처음 간 관덕정, 관덕정과 목 관아지는 예전 조선시대에 있던 제주목의 관아 즉 제주도의 도청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나도 알던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교수님의 설명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가셨다. 그렇다. 충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고려시대 이전, 탐라국시대의 유적이 있지는 않을까?” 지금의 관덕정과 그 주변은 과거 제주의 중심으로 역할을 다하여 왔는데, “그 이전부터 중심지의 역할을 관덕정이 하였다면 그 이전 시대의 유물 또한 있을 것이다.” 라는 확신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발굴 조사결과 현재 지어진 관덕정의 터 아래에서 그 이전 시대의 터가 발견되었고, 여러 유물이 복합적으로 매몰되어 있는 가운데 지금의 모습으로 관덕정을 재 복원 하였다. 이때 복원 과정에서 탐라국의 양식이 사라진 육지의 모습과 같은 지금의 관덕정이 지어졌다고 한다. 과거의 제주는 육지와 멀리 떨어진 탓에 교류도 힘들었을 것이고, 풍토도, 생활양식도 달라서 탐라인이 직접 건축한 탐라국의 건물로 지어졌을 텐데, 지금의 관덕정은 육지의 어느 곳에나 있는 조선시대 양식의 건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과연 이 제주도내에 탐라국의 건축양식과 개성은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뒤에 두고 다음 장소인 항몽유적지로 이동하였다.
항몽유적지는 어린시절 왔을 적에는 무척이나 감명 깊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둘러보고 기억 속에 담아뒀던 유적지다. 하지만 오늘의 답사는 나의 어린 시절 기존 역사관을 완전히 바꾸었다. 처음 봤을 때는 과거의 역사관대로 그저 삼별초의 투쟁 그 자체를 중점적으로 보았던 것 같다. 따라서 몽고에 끝까지 싸운 고려무인의 드높은 기상과 자주심 호국정신에 대한 마음이었지만 입장을 살짝만 바꾸어보자. 그렇다면 이 성을 과연 진도에서 내려온 삼별초군만 쌓았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럴 리가 없다. 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러면 성의 축조에 동원되어 쌓은 제주 사람들은 삼별초군과 같은 마음가짐 이였나?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한국사라는 맥락에서 크게 보변 삼별초의 정신과 실천은 자주성의 상징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 성을 자발적으로 쌓지 않은 이상 성을 쌓으면서 몽고군과는 또 다른 외부인의 횡포 아래서 신음 한 제주민들은 어땠을까? 라는 질문을 하면 명쾌하게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삼별초군과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 물음은 당시 제주민들 만이 알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 견학으로 왔던 모충사는 방문 횟수에 비해서는 기억에 많이 남지는 않았다. 그저 현판에 적힌 한자를 보면서 나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지 않을까? 라는 추측성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충사의 건립 배경을 알고 나니 그 내면의 모습은 조금 적나라하다고 해야하는지 살짝 조심스럽지만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군부독재시대의 박정희 정권의 흐름에 맞춰 잘보이기 위한 끼워 맞추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물론 모충사에 안치된 위인들과 의녀 김만덕은 제주사에서 훌륭한 인물이다. 업적과 정신은 인정하고 존경한다. 하지만 그게 과연 모충사에서 기리고자 하는 충(忠)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의문이 든다. 김만덕이 최근 제주인의 김만덕에서 한국인의 김만덕으로 재조명 되면서 기념관도 생기고 나름 새롭게 단정한 것 같았으나, 모충사를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어수선하고 뚜렷한 갈피를 못잡은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 외에는 별다른 평을 할 수가 없었다. 모충사를 지나 근처 별도봉을 따라 내려간 산책로에서는 일본군의 갱도 진지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걸어 다니던 이곳은 아직도 별다른 관리 없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는데, 제주도 전역에 남아 있는 이런 장소가 아직도 그 실체를 명확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실망스러웠다. 일부러 방치해 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리 아픈 역사도 역사는 역사인데 반성의 현장이자, 교육현장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4.3사건까지 휘말려 이 일본군이 파둔 토굴에서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관리가 필요하다는 의지에 한 몫 하였다. 최근 사비를 들여 만들었던 일본군진지 박물관이 무관심 때문에 재정난에 허덕여 일본에서 매입한다는 소식을 떠올리며 더욱 참담한 기분을 되새김질 하게 하였다.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기분이랄까...? 씁쓸하다. 그렇게 곤흘동으로 이동했다.
곤흘동은 4.3사건이 발생하고 난 뒤 사람이 살지 않게 된 마을이다.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 군인들에 의해 파괴된 마을은 국가의 입장에서 곤흘동의 존재가 껄끄러웠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사건 이후 어떠한 조치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 속은 누군가에 의해 감춘채 사라져가는 마을에 불과했지만, 지금! 그나마 그 때의 사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은 유적이었다.
역사의 무대를 일제강점기로 옮겨보자 그다음 방문한 조천만세동산 내가 사는 신촌리와 가깝고 또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이곳 조천에서 보낸 터라 매년 3.1절 행사를 할 적에는 거리행진을 하며 자주 방문했던 곳이다. 매번 드는 느낌이란 그저 3.1운동을 했던 한 곳이라는 것? 정도였는데, 사실 이곳은 제주 항일운동의 성지이다. 그만큼 중요한 곳이기에 그 증거로 항일운동기념관이 다른 서귀포나 해녀박물관이 있는 곳이 아닌 만세동산에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제주도도 항일운동이 활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첫 장소인 것이다. 조천은 당시 제주에서도 개화된 지역으로 누구보다 지식인층이 많았다. 어쩌면 조천에서 항일운동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조천 항일운동의 주역인 김씨네 또한 개화된 사상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진정한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일 것이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은 조천만세동산과 함께 제주의 항일운동에 있어서 양대 산맥이다. 많은 이들이 “물질하는 할망” 정도로만 인식하는 해녀이지만 인식의 차이를 떠나 일제강점기 그들의 행동 자체에 존경과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조국의 독립이라는 구체적인 목표 아래 행동한 항일운동이 아닌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항의하여 발생하였고 일회성의 항일운동으로 이들에게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지만 불의에 저항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이고 소중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 나라의 광복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요, 연합국의 전리품도 아닌, 우리민족의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서 얻은것이다.
레포트를 쓰고 보니 오늘 하루동안 둘러본 곳이 꽤 되었다. 가본 곳은 다른 인식을 심었고, 안 가본 곳은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이번 답사에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유적들의 단편적인 모습이 아닌 그 내면과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기회를 가져 보았는데, 그 내면의 모습을 보며, 곤흘동의 사례처럼 그저 아름다운 장소가 아닌 그 속을 들여다보는 눈을 가질 수 있게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진리에 맞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더군다나 내가 살고 있는 내 고장을 모르고서는 외부인에게 제주인의 정체성을 제대로 설명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신 삼별초와 같은 육지의 중앙문화 앞에 동원되는 신 제주인 마냥 그들의 눈에 맞추기 위해 제주의 것을 스스로 눈감는 행동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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