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신지식인 - 박지원의 『열하일기』중 도강록을 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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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신지식인
- 박지원의 『열하일기』중 “도강록”을 읽고 -
1. 18세기에도 신지식인은 있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신지식인’이라는 말이 한참 유행했었다. 어떤 분야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창조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신지식인’은 현대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분명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신지식인’이 있어 왔고, 각자 다른 방법으로 당시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것이다.
박지원 역시 신지식인이었다. 높은 벼슬을 한 것도,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역사에 길이 남을 발명품을 만든 것도 아니다. 다만 붓 한 자루로 당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한 지식인! 박지원이야말로 18세기의 신지식인이 아니었을까?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운명이란, 아니 남들보다 훌쩍 앞서가는 사람들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주변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이단시되고, 결코 주류에 포함되지 못한 채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같은 고독한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박지원 역시 신지식인들이 걸어야 하는 길을 걸어야만 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신지식인으로서의 박지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실학을 외치고, 북학(北學)을 지지하는 그를 당시의 지식인들은 지조 없는 오랑캐 숭배론자로 따돌렸다. 심지어 스스로를 가리켜 세상의 모든 책을 읽었노라 자부하는 정조조차도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두고 근래 문풍(文風)이 문란해 진 것은 「열하일기」와 박지원 때문이라고 하며 박지원을 핵심에 두고 문체반정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그러나 박지원을 가리켜 18세기 신지식인으로만 평가해 버리기엔 너무나도 부족하다. 그의 『열하일기』에는 새로운 지식을 갖춘 18세기의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느낌을 뛰어넘는 다른 뭔가가 있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박지원은 지금까지 내가 알던, 아니 안다고 믿고 있었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실학사상의 거두이고, 또 양반사회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서슴지 않던 날선 지식인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독서를 통해 종종 행복해지곤 하는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통해 ‘열하’를 꿈꾸게 되고, 박지원의 삶과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그의 진심을 깨닫고 나를 돌아 볼 수 있어 행복했다.
2. 봉황성을 넘어서 안시성이... 중국의 역사를 넘어서 우리 역사를 다시 쓰다
고구려! 난 박지원이 고구려를 말한 것이 더할 수 없이 기쁘다. 요즘처럼 고구려가 안타깝게 다가오는 이 때, 박지원의 고구려에 대한 주장은 속이 뻥 뚫리게 했다. 현재 고구려 땅은 북한 땅에 있다. 그런데 중국은 심정적으로는 북한 땅까지 중국 땅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렇게 되면 땅도 땅이지만 고구려의 역사도 함께 뺏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 입장은 너무 미약하기만 한데, 마치 우리의 소극적인 태도를 예견이나 한 듯이 박지원은 고구려를 말하고 역사를 보는 우리 시각을 광대하고 주체적으로 바로 잡아 주고 있다.
박지원의 ‘도강록서(渡江錄序)’ 부분을 읽어 보면 ‘후삼경자(後三更子)’라는 말을 쓴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강을 건너면 청나라 땅이니 승정의 연호를 쓸 수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명(明)이 멸망한 지 130년이 경과되었으나 아직 승정의 연호를 쓰는 명(明) 황실이 압록강 동쪽에 의연히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시대적 고민과 주체적으로 설 수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은연 중 비치고 있는 것 같다. 박지원이 주체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뒤로 가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고구려 양만춘 장군이 당태종의 눈을 쏘아 맞혔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대군을 거느리고 온 당태종이 작은 성 하나를 점령 못하고 황망히 돌아간 것은 분명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더구나 전해 오는 한시 두 편의 기록을 보면 사실인 것 같은데 객관적인 기록이 없어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을 은폐하려는 중국의 입장만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주체적으로 기록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김부식마저도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면서 중국의 문헌만을 참고하여 우리 역사로 만들어 버린 것을 개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삼국사기(三國史記)』도 중국의 시각이 주로 반영된 것인 만큼 우리의 역사가 많이 빠졌다는 의미 아닌가? 양만춘 장군이 당태종의 눈을 쏘아 맞혀 결국 당태종이 패하게 되었다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주체적이지 못한 역사관으로 인해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안타깝다. 우리가 역사라고 믿고 있는 그 사실들이 어쩌면 역사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야사(野史)’일 뿐이라니 억울한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 ‘봉황성’이 ‘안시성’이 아닌 것은 다양한 지리서와 역사서를 토대로 하여 논리정연하게 밝혀 주고 있다. 사람들은 고구려의 방언만을 가지고 ‘봉황성’을 ‘안시성’이라고 섣불리 판단해 버리는데, ‘봉황성’은 ‘안시성’이 아니라 ‘평양’이라는 것이다. 요동은 원래 조선의 옛 땅이었고 고구려의 옛 땅이었으나, 세력이 약해져 점차 동쪽으로 옮겨 가면서 만든 또 하나의 도읍지 ‘평양’이라는 것이다. ‘평양’하면 대동강 옆의 ‘평양’만을 생각하는데 이는 우리 스스로 우리 영토를 줄여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땅은 요동 땅까지 뻗어 있었다고 하며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와 발해를 높이 평가한다. 비록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그 강토와 무력은 강대한 고구려에 비해 전혀 미치지 못했다고 하면서.
‘봉황성’을 통해 우리 땅의 경계를 반도 밖으로까지 확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봉황성이 우리나라 안의 평양과 다른, 또 다른 평양이라고 한다면, 평양에서 500리나 떨어진 안시성은 얼마나 더 중국 땅 가까이에 위치했겠는가? 요동까지 뻗혔던 우리 옛 영토를 잊어 버리고, 또 그 땅을 차지했던 고구려와 발해를 기억하지 못하고 현재 땅의 지명만을 가지고 스스로 대륙의 안쪽으로 경계를 지어 버리는 우리의 편협하고 소극적인 역사관이 한탄스럽다. 박지원 역시 과거 고구려 땅의 경계를 명확히 알아서 우리 것을 제대로 찾을 생각은 않고 명분만을 따지며 무작정 북벌만 생각하는 사대부와 벼슬아치들이 너무 답답해서 장황하게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리라.
중국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는 데도경제적으로나 외교적, 학문적으로 우리나라는 중국에 대해 경쟁력이 부족하다. 고구려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많이 방영되고는 있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 뚜렷한 역사의식을 심어 주기엔 많이 부족하다. 고구려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라는 확실한 자료를 찾아 중국의 주장을 뒤집어 줘야 하는 시점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얼마나 귀한 자료이며 한반도를 넘어가는 그의 역사의식은 또 얼마나 광대한가? 단재 신채호보다 훨씬 전에 박지원은 이미 고구려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설레이며 떠난 여행에서조차도 우리의 역사를 찾고자 하는 박지원의 모습에서 참지식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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