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신지식인 - 박지원의 『열하일기』중 도강록을 읽고 -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3.29 / 2015.03.29
  • 8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1,1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행복한 신지식인
- 박지원의 『열하일기』중 “도강록”을 읽고 -
1. 18세기에도 신지식인은 있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신지식인’이라는 말이 한참 유행했었다. 어떤 분야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창조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신지식인’은 현대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분명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신지식인’이 있어 왔고, 각자 다른 방법으로 당시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것이다.
박지원 역시 신지식인이었다. 높은 벼슬을 한 것도,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역사에 길이 남을 발명품을 만든 것도 아니다. 다만 붓 한 자루로 당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한 지식인! 박지원이야말로 18세기의 신지식인이 아니었을까?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운명이란, 아니 남들보다 훌쩍 앞서가는 사람들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주변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이단시되고, 결코 주류에 포함되지 못한 채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같은 고독한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박지원 역시 신지식인들이 걸어야 하는 길을 걸어야만 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신지식인으로서의 박지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실학을 외치고, 북학(北學)을 지지하는 그를 당시의 지식인들은 지조 없는 오랑캐 숭배론자로 따돌렸다. 심지어 스스로를 가리켜 세상의 모든 책을 읽었노라 자부하는 정조조차도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두고 근래 문풍(文風)이 문란해 진 것은 「열하일기」와 박지원 때문이라고 하며 박지원을 핵심에 두고 문체반정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그러나 박지원을 가리켜 18세기 신지식인으로만 평가해 버리기엔 너무나도 부족하다. 그의 『열하일기』에는 새로운 지식을 갖춘 18세기의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느낌을 뛰어넘는 다른 뭔가가 있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박지원은 지금까지 내가 알던, 아니 안다고 믿고 있었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실학사상의 거두이고, 또 양반사회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서슴지 않던 날선 지식인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독서를 통해 종종 행복해지곤 하는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통해 ‘열하’를 꿈꾸게 되고, 박지원의 삶과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그의 진심을 깨닫고 나를 돌아 볼 수 있어 행복했다.
2. 봉황성을 넘어서 안시성이... 중국의 역사를 넘어서 우리 역사를 다시 쓰다
고구려! 난 박지원이 고구려를 말한 것이 더할 수 없이 기쁘다. 요즘처럼 고구려가 안타깝게 다가오는 이 때, 박지원의 고구려에 대한 주장은 속이 뻥 뚫리게 했다. 현재 고구려 땅은 북한 땅에 있다. 그런데 중국은 심정적으로는 북한 땅까지 중국 땅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렇게 되면 땅도 땅이지만 고구려의 역사도 함께 뺏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 입장은 너무 미약하기만 한데, 마치 우리의 소극적인 태도를 예견이나 한 듯이 박지원은 고구려를 말하고 역사를 보는 우리 시각을 광대하고 주체적으로 바로 잡아 주고 있다.
박지원의 ‘도강록서(渡江錄序)’ 부분을 읽어 보면 ‘후삼경자(後三更子)’라는 말을 쓴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강을 건너면 청나라 땅이니 승정의 연호를 쓸 수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명(明)이 멸망한 지 130년이 경과되었으나 아직 승정의 연호를 쓰는 명(明) 황실이 압록강 동쪽에 의연히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시대적 고민과 주체적으로 설 수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은연 중 비치고 있는 것 같다. 박지원이 주체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뒤로 가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고구려 양만춘 장군이 당태종의 눈을 쏘아 맞혔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대군을 거느리고 온 당태종이 작은 성 하나를 점령 못하고 황망히 돌아간 것은 분명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더구나 전해 오는 한시 두 편의 기록을 보면 사실인 것 같은데 객관적인 기록이 없어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을 은폐하려는 중국의 입장만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주체적으로 기록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김부식마저도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면서 중국의 문헌만을 참고하여 우리 역사로 만들어 버린 것을 개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삼국사기(三國史記)』도 중국의 시각이 주로 반영된 것인 만큼 우리의 역사가 많이 빠졌다는 의미 아닌가? 양만춘 장군이 당태종의 눈을 쏘아 맞혀 결국 당태종이 패하게 되었다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주체적이지 못한 역사관으로 인해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안타깝다. 우리가 역사라고 믿고 있는 그 사실들이 어쩌면 역사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야사(野史)’일 뿐이라니 억울한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 ‘봉황성’이 ‘안시성’이 아닌 것은 다양한 지리서와 역사서를 토대로 하여 논리정연하게 밝혀 주고 있다. 사람들은 고구려의 방언만을 가지고 ‘봉황성’을 ‘안시성’이라고 섣불리 판단해 버리는데, ‘봉황성’은 ‘안시성’이 아니라 ‘평양’이라는 것이다. 요동은 원래 조선의 옛 땅이었고 고구려의 옛 땅이었으나, 세력이 약해져 점차 동쪽으로 옮겨 가면서 만든 또 하나의 도읍지 ‘평양’이라는 것이다. ‘평양’하면 대동강 옆의 ‘평양’만을 생각하는데 이는 우리 스스로 우리 영토를 줄여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땅은 요동 땅까지 뻗어 있었다고 하며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와 발해를 높이 평가한다. 비록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그 강토와 무력은 강대한 고구려에 비해 전혀 미치지 못했다고 하면서.
‘봉황성’을 통해 우리 땅의 경계를 반도 밖으로까지 확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봉황성이 우리나라 안의 평양과 다른, 또 다른 평양이라고 한다면, 평양에서 500리나 떨어진 안시성은 얼마나 더 중국 땅 가까이에 위치했겠는가? 요동까지 뻗혔던 우리 옛 영토를 잊어 버리고, 또 그 땅을 차지했던 고구려와 발해를 기억하지 못하고 현재 땅의 지명만을 가지고 스스로 대륙의 안쪽으로 경계를 지어 버리는 우리의 편협하고 소극적인 역사관이 한탄스럽다. 박지원 역시 과거 고구려 땅의 경계를 명확히 알아서 우리 것을 제대로 찾을 생각은 않고 명분만을 따지며 무작정 북벌만 생각하는 사대부와 벼슬아치들이 너무 답답해서 장황하게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리라.
중국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는 데도경제적으로나 외교적, 학문적으로 우리나라는 중국에 대해 경쟁력이 부족하다. 고구려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많이 방영되고는 있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 뚜렷한 역사의식을 심어 주기엔 많이 부족하다. 고구려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라는 확실한 자료를 찾아 중국의 주장을 뒤집어 줘야 하는 시점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얼마나 귀한 자료이며 한반도를 넘어가는 그의 역사의식은 또 얼마나 광대한가? 단재 신채호보다 훨씬 전에 박지원은 이미 고구려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설레이며 떠난 여행에서조차도 우리의 역사를 찾고자 하는 박지원의 모습에서 참지식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열하일기를 읽고
  • 중심으로 하는 당파싸움에서 세자를 배척한 당파. 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년) 친족형 박명원이 청 고종의 고희를 축하하기 위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하여,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보고, 그들의 풍요로운 경제상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을 보고, 열하일기를 집필하게 된다. 박지원이 살고있던 당시의 시대배경을 살펴보면, 당쟁과 외침으로 인한 혼란기였다.

  • 독후감 -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열하일기」에 나온다. 어려운 삶을 살아가다 친구 유언호가 개성유수로 조정의 감시의 눈을 피하게 하고 돌봐준다. 이때 연암은 입시공부에 시달리는 학인에게 사색하는 법, 토론, 분변하는 법을 가르친다. 제자 이서구가 쓴 에 보면 마흔이 못 되었는데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쇠락하여 담담히 세상의 뜻이 없다고 토로한다. 열정어린 젊음의 뒤안길을 헤쳐나온 쓸쓸한 중년 박지원의 모습이 떠오른다.「회우기」는 홍대

  • 고전산문 도강록 독후감
  •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도강록(渡江錄)’이다. 읽고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을 일러줘. 한 시간 뒤에 올게 하고는 글을 두고 나간다.그녀의 손때에 꼬질꼬질해진 종이.“이 술도 먼 행로에 약간은 도움이 되겠지. 쓸쓸히 혼자서 한 잔 부어 마신다. 동쪽을 바라보니 용만(龍灣)․ 철산(鐵山)의 모든 산들이 첩첩한 구름 속에 들어 있다. 술 한 잔을 가득 부었다. 문루 첫 번째 기둥에 뿌렸다. 잘 다녀올 것을 스스로 빌었다. 또 한 잔을 부어 다음 기둥에 뿌

  • 위대한 한국의 위인들A+
  • 일기 등의 견문기를 썼다. 그의 견문기로 인해 일본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과 1881년 신사유람단을 파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김대건(1822∼1846)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 세례명은 안드레아. 천주교 103위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1831년 조선 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중국 마카오에서 신학교를 졸업했다.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어 귀국, 활발한 전교 활동을 폈다.1846년 프랑

  • [공무원]한국사 기출 모음집(1990년~2006년)
  • 중 성격이 다른 하나는?① 진흥왕 순수비 ② 임신서기석 ③ 광개토대왕비 ④ 중원고구려비5. 다음 예문을 읽고 당시 사회를 유추한 것 중에서 잘못된 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以當時償殺).㉡ 사람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相傷以穀償).㉢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되, 자속(自贖)하려는 자는 돈 50만을 내야 한다(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子贖子人五十萬).㉣ 부인들이 정신(貞信)하여 음란하지 않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