떳떳한 부모의 당당한 아이 키우기 독서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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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문]
떳떳한 부모의 당당한 아이 키우기
기독교 상담에 관한 책을 고르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던 중 누군가 이 책을 추천해 주었다. 그래서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읽었던 나는 기대 이상의 많은 부분에 대해 알게 되었고 정말 자녀 양육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책은 가정 상담 부분 그 중에서도 자녀 양육에 관한 책이다. 솔직히 아직은 내 나이가 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생각은 아직 내 머리 속에 없었다. 그저 막연히 어떻게 키우고 뭘 시키고 하는 그런 보편적인 생각 밖에는 없었다. 이 책에는 자녀 양육의 중요성이 쓰여 있었고 또 그것을 정말 잘 인식하게 해주었다.
이 책에는 잘못된 자녀 양육이 행해지고 있는 가정을 수치심이 있는 가정, 즉 역기능의 가정이라 표현하고 있다. 어느 가정이나 수치심은 가지고 있다. 그것이 큰 수치심이냐 작은 수치심인가만 다를 뿐 어느 정도의 수치심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큰 수치심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알코올 중독자의 부모가 있는 가정이나 심한 아동 학대 및 성 학대가 일어나는 가정이다. 작은 수치심의 가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가정의 모습일 수도 있다.
수치심은 사람이 완벽할 수 있으며 또 완벽해야만 한다는 거짓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부모가 아이를 키울 때 흔히 부모는 완벽해야 하며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거짓에 빠지곤 한다. 이 말은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사실 이것은 수치심에 주는 거짓일 뿐이다. 수치심이 비교적 적은 부모들은 자신에게나 가정에 문제가 발생할 것을 예상한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에 주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말한다. 반면 수치심이 있는 부모는 문제를 인정하거나 해결하지 못하며, 일관성과 균형 있게 자녀를 양육하지 못한다. 그들이 인정하지 않은 문제는 여전히 남아 가정과 자녀에게 영향을 끼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수치심에 얽매인 부모는 ‘나는 완벽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문제를 직시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고 겉치레에 치중한다. 자신과 부모, 가정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실제로 어떠한가 보다 중요하다.
어린 시절에 받은 잘못된 자녀 교육을 이제 부모가 되어 자신의 자녀에게 ‘똑같이 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회복이다. 회복은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다. 회복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선택해야 한다. 부모가 먼저 문제를 직시하고 인정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진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부모의 선택이 자녀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린 아이로서 다른 정보가 전혀 없는 자녀는 부모의 말이 진리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제 어느 정도 자란 자녀가 자신의 생각과 다른 가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모에게 설명을 요청했을 때 수치심 있는 부모가 그렇게 하는 것은 바보스럽고 미친 짓이라고 암시적으로, 혹은 드러내놓고 하는 말을 들어왔다면, 또한 자녀가 그런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은 불효라고 말하며, 만일 가족의 일원으로 남고 싶다면 부모의 방법대로 생각하라는 암시를 받는다면 어떨까? 가족이 제공하는 음식, 집, 친척을 대신할 다른 자원이 없는 자녀로서는 부모의 제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버림받을 텐데, 그것은 생명에 대한 위협과도 같다. 그래서 어느새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부모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게 된다. 부모나 다른 어른들이 자녀에게 현실을 잘못 인식시킬 때, 그것은 자녀에게 걸림돌이 된다. 자녀는 거짓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개인적, 영적으로 비참한 결과를 맛볼 수 있다.
수치심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큰 결단과 의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검토하고 어린 시절에 받았던 어두운 부분을 끌어내고 그것을 진리와 비교하며 자신의 빼앗겼던 선택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진리를 선택하면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다. 이러한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알았다면 용서하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용서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인식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정말로 상처를 입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의 반응을 되찾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나 다른 보호자에게 상처를 받으면 대개 분노, 두려움, 슬픔 등의 감정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수치심 있는 가정의 부모들은 일반적인 감정, 특히 분노, 두려움, 슬픔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자녀는 그런 정당한 인간다운 감정을 숨기도록 배운다. 결과적으로 감정을 부정 하던가 무감각해진다. 기분을 전환하는 음식, 약을 먹어서 감정을 둔화하기도 한다. 음식으로 고통스런 감정을 해결하려하거나 일에 몰두함으로서 이러한 감정을 잊으려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평화와 정서적 치유를 가져다주는 용서 과정에 한 가지 더 필요한 요소가 있다. 용서는 앙갚음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격분, 원망, 쓴뿌리는 앙갚음하고 싶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막대한 정서적 에너지를 소진 시킨다. 앙갚음할 권리를 포기하면 자유롭게 모든 에너지를 증오와 상처가 아닌 치유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용서는 아니다. 용서는 고통을 평가 절하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심각한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게 할 때 자신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고통을 평가 절하 하는 셈이다. 그리고 용서는 ‘이해한다’며 없던 일로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다. 또 용서한다고 저절로 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불행히도, 용서하면 반드시 잊어버려야 한다는 신화가 존재한다. 감정의 깊은 상처는 한번 떠오르면 기억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또한 상처받은 기억에 따르는 격한 감정은, 우리가 용서를 향해 진지하게 항해할 때조차 종종 항로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정직하게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용서는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하나님께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기까지 오랜 동안 복수하며 방황하는 시간을 보낸다. 용서는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그의 도우심을 구하며 이루어가는 것이다. 또 용서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화해라는 과정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상대방이 변화되기를 희망하면서 기다리는 가운데, 기꺼이 화해하려는 자발적인 마음을 포함하고 있다. 용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다. 개인적인 행복을 촉진하며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이끌어준다.
이것은 수치심을 벗어버리기 위해 진리를 선택하고 결단하고 실행하는 것의 일부이다. 부모가 먼저 회복되지 않으면 그 영향을 받고 자란 자녀는 자신의 부모가 양육했던 것처럼 자신의 자녀를 양육할 것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이어지며 악순환을 계속할 것이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신학자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우리 육신의 부모에게 얻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치심이 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두렵거나 위험하며 항상 자신이 더 많은 기대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아주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로 누릴 수 있게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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