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소설의이해 자기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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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For Ourstory
-The Room of Ones Own을 읽고...
나는 여자이다. 21세기의 한국을 살고 있는 23살의 여자이다. 그런 내게, 어쩌면 먼 나라 남의 이야기에 불과할 19세기 말 영국 여성의 이야기가, 살을 파고들 정도로 절실하게 다가온다. 단지 ‘여성’이라는 gender를 공유했기 때문이라면 너무 억지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19세기의 영국과 21세기의 한국, 아니면 다른 어느 사회라도, 그 단지 ‘여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는 방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여성’이라는 특징은 왜 그렇게 억압받아야만 했을까, 어째서 그 때에도, 지금에도 비주류인 채 남아있는 것일까.
울프는 당시 여성의 삶을 두 가지 방법에 근거하여 이야기한다. 하나는 허구를 이용하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서술기법이다. 먼저, 이 작품은 허구라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하여 그 안에서 이야기를 펼쳐 나아간다. 그런데 그 가상의 공간은 실제로는 허구가 아닌 허구이다. 허구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안에 실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즉,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허구가 아닌 허구 속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허구라는 상황 자체는 읽는 이들에게 더 쉽게 다가가며 결국 세상의 일들은 모두 본질에서 빗겨간 모습들의 덩어리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허구라는 가상의 공간은 현실의 독자들이 작품의 구도 안에 각자 자유로운 문제의식을 갖고 들어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러한 허구라는 구조 덕분에 나는 실제가 오히려 허구 같은 부조리함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19세기 말 영국의 이야기 속에서 내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버지니아 울프의 탁월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유명하다. 비록 상식적인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읽는 도중 내내 난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어느 순간 그녀와 나는 함께 강둑을 걸으며 생각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이 무엇인가를 따져볼 틈도 없이 같이 빠져서 생각한 것이다. 그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융합될 수 있었던 것은 의식의 흐름 기법 자체가 논리적 전개를 잃어버린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 실상 세상 어떤 사람도 논리적 개요에 의해 생각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런 서술은 겉으로는 다소 어색하고 이상해 보이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서술일 수 있는 것이다.
총 6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여자가 왜 가난한가’ 라는 현재의 고민으로부터 출발하여, 과거의 여자인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들의 삶을 분석하고, ‘자물쇠’와 ‘500파운드’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다시 미래의 바람직한 모델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된 양성적인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과거, 미래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은 오히려 모순으로 가득 찬 여성문제를 지극히 논리적으로 분석해낸다.
울프는 묻는다. 셰익스피어에게 그만한 문학적 재능을 지닌 여동생이 있었다면 그녀는 과연 오빠 만한 명성을 누릴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냐고. 나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허난설헌이 떠올랐다. 그녀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방에 틀어박혀 바람둥이 남편 때문에 속을 썩히는 아녀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선에 태어난 것을 한탄하고, 그 중에서도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탄하고, 그 중에서도 자기남편. 김성립의 부인이 된 것을 한탄했을 것이다. 울프는 그 한탄을 단순한 한탄으로 보는데 그치지 않고 그 저변에는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분석해낸다. 허난설헌이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시를 쓴 개별 작가로서 보다, 허균의 누이, 혹은 김성립의 부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유는, 여성은 남자를 두 배로 확대시키는 반사거울의 역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남성은 그런 여성을 억압함으로서 자신의 우월 의식을 확고히 해왔고 그와 동시에 남성 스스로도 변질되어왔다. 결국 이런 구조에서 가해자가 되는 것은 그 구조 자체 일뿐, 남성도 여성도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여성을 문학 분야에서 좀 더 조명해보면, 여성들이 문학 분야에 남자와 같은 명성을 날리기란 매우 어려운,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한 문학적 재능을 얻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사회구조였고, 설령 얻었다 하더라도 남자들의 적의에 의해 분노만 쌓여갈 뿐이었다. 그러한 분노 속에서 여성들의 작품은 심하게 왜곡되고 뒤틀리게 되었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현재에 와서 비추어봐도 여성에 대한 차별은 아주 당연한 사실처럼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부터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할지 엄두가 나질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오늘날에는 울프가 살던 그 시기에 비해 표면적으로는 많은 차별이 사라졌다. 많은 여류 작가들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고 거의 모든 직업군의 금녀의 벽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여전히 의식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리고 그 ‘의식’이라는 것은 한 사회의 구조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표면적인 요소들 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아직도 뿌리깊게 박혀있는 남자가 여자를 책임져야 한다는 발상이나, 여성의 얌전함과 조신함이 미덕이 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의식’의 문제는 제도의 문제보다 더 끈질길 뿐더러, 남성뿐 아니라, 남성 중심의 의식 구조에 길들여진 여성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역시 필요한 것은 사색을 가능하게 해주는 500파운드와 자물쇠인지도 모르겠다. 경제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경제적인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고, 남자가 여자를 책임져야한다는 발상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차별적 의식 구조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거나 내면화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성 스스로가 사고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최소한의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외부와 구분 짓는 자물쇠가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여자로 산다는 것을 고민하는 일은 남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과 동등한 가치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둘 다 어느 한 쪽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의 하위 범주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여성 문제를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페미니즘을 직역하면 ‘여성주의’이지만, 페미니즘의 지향점은 여성의 안위와 복지가 아니라, ‘양성 평등’이다. 울프가 말하는 자기만의 방은 ‘여성이 남성처럼 글을 쓰고, 남성처럼 살고, 남성처럼 보이기’ 위한 곳이 아니다. 그곳은 오히려 가부장제가 어설프게 나누어 놓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모순된 이분법적 구분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양성성을 창조해내는 곳이다. 양성성은 단순히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진 혼합형의 인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런 것은 남성답다’ 거나 ‘이런 것은 여성스럽다’ 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를 벗어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가부장제 아래의 여성의 억압적 상황과 삶의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여성과 남성의 자리를 바꾸려 하거나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려는 제한적 몸짓이 아니라 이런 ‘양성성’이라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아 먼 여행을 떠나는 불완전한 동그라미의 이야기를 그린 동화를 읽은 기억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사회는 그 동그라미처럼 한 구석이 빈, 불완전한 상태로 힘겹게 굴러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 불완전한 History의 이가 빠진 구석구석에 모자란 herstories를 채워 넣어 완성된 Ourstory라는 동그라미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다. 남성과 여성, 어느 한 쪽의 행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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