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베르사이유의 행진 혁명의 숨겨진 주인공 여성들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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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과 베르사이유의 행진.
혁명의 숨겨진 주인공-여성들에 관하여.
여성에게 프랑스 혁명이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베르사이유로 향한 여성들의 행진 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여성들의 움직임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1789년 10월 5일 베르사이유 행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급히 혁명 시대의 여성들에 대해 논하기 전에 혁명이 여성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1789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1789년 이전의 시대의 여성들의 삶과 1789년 이후부터 1795년 집정내각이 들어서기 전까지의 여성의 삶을 추적해보겠다. 그리스 시대 여성이 신분상으로 한 남자의 공식적인 부인, 고급 매춘부, 아무렇게나 다뤄지며 함부로 대할 수 있었던 거리의 창녀들로 나누어졌다면 프랑스 혁명기의 여성은 귀족의 여성, 평민의 여성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여성이란 귀족 여성과 평민 여성(파리의 평민 여성 혹은 지방의 농부의 아낙네)으로 구분하여 논의될 것이다. 귀족 여성들은 그들의 살롱을 통해 혹은 자신의 남편이나 애인을 통해 이미 정치, 문화적인 면에서 남성들과의 교류(交流)가 있었고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쳐왔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프랑스의 평민 여성들은 언제나 남편의 통제 아래 생활했었기에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貫徹)시킬 기회도 적었으며 그렇게 행동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여성사적 입장과 프랑스 혁명사에서 바라본 여성의 혁명 참여에 대해 다뤄보면서 본인의 의견을 정리해보겠다. 참고문헌은 마지막 장(章)에 언급하였으며 본인 생각의 강조와 보다 정확한 용어의 사용을 위해 한자나 영어를 사용할 것이다.
1. 귀족(貴族) 여성과 평민(平民) 여성의 삶.
귀족 여성들의 사회적 입지(立地)는 분명 평민 여성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프랑스의 귀족 여성들은 세련되고 고상한 궁정 예절에 의해 ‘그럴듯한’ 대우를 받았으며 우아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귀족 여성들의 삶을 엿보기 위하여 궁정의 여성들의 삶부터 살펴보자.
왕국의 여인들의 생활을 살펴보기 위해서 좋은 예가 되는 사람은 루이 15세의 세련된 애인 퐁파두르 부인(Pompadour, Marquise de)일 것이다. 그녀의 발자취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퐁파두르 부인(Pompadour, Marquise de)의 부모는 중산층으로 금융가의 투기꾼이었다. 당시 일부 투기꾼은 엄청난 재산을 모았지만 대부분은 감옥신세 아니면 빈털터리가 되었다. 아버지 프랑수아 푸아송이 암시장사건에 연루되어 1725년 국외로 도망한 후 그의 아름다운 아내와 두 자녀는 그들보다 더 부자인 친구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이 보살폈다. 두 자녀는 총명했고 그 중 딸은 더욱 뛰어났다. 퐁파두르 부인은 부자의 아내가 되는 교육을 받았다. 결혼할 나이에 접어들었을 때 그녀는 어떤 상류사회에서든 자신의 존재를 내세울 수 있게 되었으며 볼테르(Franois-Marie Arouet)와 같은 유명인사와도 교분을 나누었다.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은 그녀를 자신의 친조카이며 유망한 젊은이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투알과 짝을 맺어주었다. 그들은 딸 알렉산드리네를 두었다. 그녀는 파리 사교계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고 국왕 루이 15세의 찬사를 받았다. 1744년 루이 15세의 젊은 정부인 샤토루 공작부인이 갑자기 죽자 그녀는 곧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녀는 남편과 법적인 이혼절차를 밟은 뒤 퐁파두르 후작작위를 받았다. 부끄럼 많고 내성적인 루이 15세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이러한 국왕 곁에서 퐁파두르는 개인 비서 역할을 하면서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물론 결정은 국왕이 했지만 국왕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조심스럽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퐁파두르는 5년쯤 지나 아래층의 정식 왕실로 거처를 정했다. 루이 15세는 이후 여러 명의 정부를 두었으나 퐁파두르의 지위는 전보다 확고해졌다. 국왕의 허락, 승진, 특권의 행사가 그녀의 집무실을 통해 이루어졌다. 퐁파두르는 국왕과 정치·예술 양면에서 공동으로 협력했다. 예술 분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녀의 제의로 그녀의 오빠는 왕궁 감독관에 임명되고 마리니 후작 칭호도 얻었다. 국왕, 퐁파두르, 마리니 후작은 완전한 3박자 조화를 이루어 파리의 에콜 미리테르와 루이 15세 궁전(지금의 콩코르 궁전), 베르사유의 콤피앙 궁전과 페티트 트리아농 궁전의 대부분, 퐁텐블로 궁전의 날개, 아름다운 샤토 드 벨류브, 많은 간이건물과 여름 휴양소 등을 설계·건축했다. 루이 15세와 퐁파두르는 화가, 조각가, 가구제조업자, 왕실 세공업자 등 모든 종류의 장식미술가들을 후원했다. 그 결과 유명한 도자기 공장이 세브레에 건립되기도 했다. 퐁파두르의 20년 전성기는 프랑스 양식의 최고 정점을 이루었다. 작가와 백과사전 편집자의 후원자인 그녀는 미술 분야와 같이 문학도 후원하려 했으나 국왕은 문학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알고 있는 지식인들을 싫어했다. 그러나 정치분야는 예술분야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유능한 관료 수아죌 공작이 퐁파두르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는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공국들에 대항해 프랑스와 옛 적국 오스트리아가 연합하는 유명한 반동맹(Reversal of Alliances)을 추진했다. 이 전략은 정치가다운 발상이었으나 여론의 지지를 받지도 못하고 프랑스에 재앙을 안겨준 7년전쟁을 유발했다. 이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규모는 대단하지만 지휘통솔능력이 결여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군대를 물리쳤다. 그 사이 영국은 캐나다로부터 프랑스를 몰아냈다. 이러한 패배의 결과는 퐁파두르에게 몰아닥쳤으며 그녀는 우울증에 빠져 전쟁이 끝나자마자 베르사유 궁전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재판 오심(誤審) 사건인 칼라 사건의 번복에 대해 루이 15세의 승인을 얻어냈다. 볼테르는 퐁파두르 부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추모한다…… 천성이 진실한 그녀는 국왕을 사랑했다. 그녀는 올바른 영혼과 정의로운 가슴의 소유자였다. 이 모든 것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퐁파두르 부인은 매우 박식(博識)하였고 문학에 정통(精通)하였으며 음악 감각도 뛰어난 여자였다. 그는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의 후원자였으며 베르사이유 궁정 문화의 꽃이었다. 그녀는 왕궁의 무도회, 독서토론, 음악회를 주관했다. 그녀는 약 15년간 권세를 누리면서 왕정(王政)의 인사(人事)마저 결정하였다. 비단 퐁파두르 부인만이 자신의 살롱을 열어 사회에 영향을 끼쳤던 것은 아니다. 베르사이유궁에 거주하지 못한 파리의 많은 귀족부인들 역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남편들에게 귀족 사회에서 끊이지 않는 정사(情事), 남의 소문 이야기, 돌팔이 같은 개똥 철학자들 이야기를 즐겨 하였고 무도회에서 자신들의 외적인 아름다움과 동시에 지적인 아름다움을 뽐냈다.
랑베르 부인(Madame de Lambert)의 살롱은 그녀 자신을 잘 표현해주는 문학적 성격이 깊은 살롱이었다. 남편 랑베르 백작이 죽은 1710년, 그녀는 궁정 밖에서 당시의 계몽주의 사상가나 작가, 신문 기자, 음악가, 화가, 조각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위해 살롱을 열였다. 귀족들과 왕족들과 여러 지적 교류를 나눌 수 있었던 그녀의 살롱은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랑베르 부인은 아카데미 회원 선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아카데미를 지원했다. 랑베르 부인이 나이를 먹어감에 떠라 그녀의 후계자로 적합한 탕생 부인(Mme de Tencin)이 랑베르 부인의 살롱을 이어받아 빛나는 살롱 문화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정치적인 면에서 궁정과의 대립으로 잠시 그녀의 살롱이 폐쇄당하고 그녀 자신도 파리에서 추방당했지만 그 후에 정치적 움직임이 아닌 순수 문학 살롱으로 거듭났으며 프랑스의 각계 신분층의 지식인들과 귀족들, 자칭 물리학자와 철학자였던 에밀 뒤 샤틀레, 너무나 유명한 사상가 몽테스키외, 아카데미에 추천 받았던 마리보, 성직자, 영국 귀족인 체스터필드 경, 볼링브로크 경, 매튜 프라이어 등이 드나들며 살롱 문화를 살찌웠다.
평민 여성들의 삶은 피폐(疲弊)하고, 절망적이며 어두운 그늘 속의 무덤이었다. 당시 유렵 세계가 여성을 어떤 존재(存在)로 바라보았는지 알기 위해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중세 유럽에서는 결혼의 무효를 선언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남편이 부인을 마녀로 몰아세워 종교재판을 받게 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다른 남자와 간통을 범했다고 하여 쫓아내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십자군 전쟁이 시작 되면서 여성들의 입장이 매우 불리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십자군 전쟁 기간에 영주가 전쟁을 나가면 그 영주의 성을 지키는 사람은 대부분 영주의 부인이었다. 영주들이 전쟁에서 살아서 돌아올 경우 영주들은 자신의 부인들이 하고 있던 일들- 영주의 부재로 인해 남편 대신 성을 지키고, 농사를 돌보고, 다른 영주와의 거래나 성 안에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영주 부인들을 보고 남편의 입장으로서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인의 그러한 능력을 순수한 마음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빼앗기 위해 부인을 마녀로 몰아세우거나 간통죄를 범했다고 하는 경우가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영주가 자신의 부인을 질투하거나 쫓아내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중세에 여성에 대한 가치관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중세에 여성에 대한 인식은 여성은 남성에서 만들어진 존재이며 따라서 남성 다음으로 창조돤 열등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사악하지만 매력적인 육체를 가진 존재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가진 존재이자 악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사회의 전반적인 여성에 대한 인식은 영주들로 하여금 혹은 영주 밑의 남성 신하들로 하여금 남성의 부재 아래 여성이 성을 꾸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질투심을 느낄 수 있었고 남성의 역할을 빼앗기는 것 아닌가 하는 심리적 불안감에 여성을 적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마을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영주나 영주의 남자 후계자가 있을 경우 영주부인이 지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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