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사론 맹사성 강호사시가 이현보 어부가 비교 강호사시가 작품 분석 강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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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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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가사론 - 맹사성 <강호사시가>, 이현보 <어부가> 비교
Ⅰ. 서론
Ⅱ. 본론
Ⅱ-1. 작품 분석
1. 강호사시가
2. 어부가
Ⅱ-2. 작품 비교
1. 공통점
2. 차이점
Ⅲ. 결론
Ⅲ-1. 문학사적 의의
Ⅲ-2. <강호사시가>와 <어부가>
Ⅳ. 참고문헌 Ⅰ. 서론
유교적 이념이 지배했던 조선시대의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작품은 그 특성이 유교적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작자의 미의식이 작품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사회의 지배계층이고,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 계층이라는 의식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뜻을 펼쳐 어진 정치를 행하고, 그로 인하여 사회와 백성을 교화 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사대부의 의식이 작품에서도 드러나는데, 그 중 그들의 자연관을 드러내는 대표적 작품으로 <강호사시가>와 <어부가>를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자연시나 강호가도의 맥락은 맹사성의 <강호사시가>로부터 조준, 황희, 정극인, 농암, 송순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사대부들은 자연을 예찬하고 자연에 귀의하여 생활하는 것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이는 사대부들의 삶의 방식과 연관된 것이었고, 또한 자연을 예찬하는 강호가도의 도학을 기반으로 한 그들의 문학관, 세계관과도 합치되는 것이었다.
즉, 불안정한 사회와 분분한 당쟁의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벼슬길로 나서 자칫 거기에 휩쓸려 일신과 가문을 위기로 몰고 가기보다는, 고향의 자연에 귀의하여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는 것이 보다 안전한 삶의 방식이라는 사고가 그들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경제적 여건이 이미 충족되어 있는 사대부라는 그들의 지위에 의해 그들의 관심은 불안한 사회적 상황을 떠나 일신의 안전과 유유자적한 삶이라는 곳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자연(自然)이라는 공간은 언젠가 다시 돌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수양하며 자신의 학문을 연찬하고, 나름대로의 철학적 사유체계를 완성시키는 동시에 일신을 보존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즉, 자연은 현실 사회와 동떨어진 것이 아닌 연속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분석하고 비교하고자 하는 맹사성의 <강호사시가>와 이현보의 <어부가>에는 그러한 그들의 자연관이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Ⅱ-1. 작품 분석
1. 강호사시가
1-1. 작자 소개 - 맹사성
맹사성(1360~1438)의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동포(凍浦),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온양 출생으로 1386년(우왕1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을 거쳐 전의승, 기거사인, 우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윤, 대사헌, 예조판서, 호조, 공조를 거쳐 1419년(세종1)에는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427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태종실록』을 편찬할 때 감관사로서 감수하였다. 72세(1431년)에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를 겸임하여 『팔도지리지』를 찬진하고 76세(1435년)에는 노쇠하여 국사를 돌볼 수 없다고 간청하여 좌의정을 그만두었다. 이러한 정치 생활을 끝내고 고향이나 다름없는 온양으로 내려가 태평문민이 되어 지은 작품이 바로 최초의 연시조 <강호사시가>이다. 그는 청백리로 평민적 생활을 하였고, 1438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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