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조사] 노천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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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노천명론
Ⅰ. 노천명의 생애
노천명은 황해도 장연군 순택면 비석리에서 소지주요 무역 상인인 아버지 노계일과 서울 양반 가문에서 고전적 교양을 닦은 어머니 김홍기의 2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노천명의 어머니는 서예와 묵화도 잘 했으며 병풍에 그려진 그림과 관련하여 노천명에게 옛날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다고 한다. 본명은 기선이었으나 5세 때 홍역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깨어났으므로 천명으로 고쳤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겪게 된 서울로의 이주라는 공간 이동이 그의 또 하나의 정신적 외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30년 진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게 되는데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기 전 겨울 모친이 세상을 떠난다. 이화여전 영문과에 재학하면서 노천명은 변영로, 김상용, 정지용 등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시 습작에 열중하여 교지나 신동아지에 작품을 발표했다 《시원》동인으로 등단하기 이전 발표한 작품
[ 시 ] 1932년 ‘밤의 찬미’ ( <신동아> 8호 )
‘단상’ ( <신동아> 7호 )
‘포구의 밤’ ( <신동아> 12호 )
‘제석’ ( <신가정> )
[소설] 1932년 ‘닭 좇던 개’ ( <신동아> 10호 )
[수필] 1932년 ‘신록’ ( <신동아> 8호 )
. 이때 그는 시만이 아니라 시조, 수필, 단편소설까지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창작하였다. 이화여전 졸업 후 곧바로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일하게 된다. 그는 신문 지면을 이용하여 수필과 시를 발표했다. 1935년에 동인지 시원 1935년 2월 시원사에서 창간된 시가 중심의 문예지. 김광섭, 김상용, 오희병, 모윤숙, 노천명 등이 참여하고, 1935년 12월 통권 5호로 종간된다. 《시원》은 《시문학》과 더불어 순수시의 길을 걸었고, 특히 시어에 기울이고 표현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다. - 한국근대시문학사연구, 김혜니, 국학자료원, 2002
창간호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이화여전 때부터 연극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극예술 연구회에 참여했다. 이 때 연극을 보러 온 한 남자와 사랑이 싹트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보성전문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평양 출신의 김광진 교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이 실패하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1937년에는 조선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연길, 이두구 등을 여행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정립할 필요를 느꼈고, 자신의 시작을 정리하여 49편의 시를 수록한 첫 시집 산호림을 자비로 출판하게 된다. 이후 다시 조선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여성>지의 편집 기자로 취직하게 된다. 이후 <매일신보>에 입사한 노천명은 총독부가 만든 어용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간사로 참여하게 되고, 친일 시를 쓴다. 노천명의 친일 시 창작은 1942년 2월 조광지에 ‘기원’, ‘전승의 날’ 발표, 매일신보에 ‘싱가폴 함락’, ‘부인 근로대’,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의 발표로 이어지고, 이외에 제2시집 창변초판본에 실린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의 작품도 친일적 경향의 작품이다. 해방 후에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개명되고 노천명은 계속 문화부에 근무한다. 한국 전쟁 기간은 노천명에게 또하나의 시련기였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노천명은 자신의 집에서 북쪽 군대에게 끌려간다. 정치보위부의 조사를 받은 후 문학가 동맹 사무실에 나가 그들이 시키는 일을 해야 했다. 서울 수복 후 북쪽 군대가 후퇴하고 그들을 따라 월북할 수도 없었던 노천명은 남쪽의 정보 부대에 의해 부역문화인으로 지목되어 구속된다.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김광섭, 김상용 등의 구출운동에 힘입어 투옥된 지 6개월만인 1951년 4월에 출옥하게 된다. 이후 카톨릭에 귀의하고, 출옥 후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부역 혐의에서 벗어나려는 듯 국군의 진군을 격려하는 내용이나 애국심을 담은 시를 몇 편 발표하였다. 1957년 3월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쓰러져 요양과 입원을 반복하다가 3개월 후 자택에서 운명하였다. 시집으로는 ‘산호림’(1938), ‘창변’(1945), ‘별을 쳐다보며’(1953), ‘사슴의 노래’(1958) 등이 있다.
Ⅱ. 시 세계의 변모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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