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高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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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은(高銀)에 대하여
1. 작가의 생애
본명은 은태, 법명은 일초(一超)이다. 1933 8월 1일 군산시 미룡동 138번지에서 아버지 고근식 어머니 최점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0년의 6·25 전쟁 중에 이름의 끝 자는 떼어내고 고은이라고 바꾸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43년 미룡국민학교 입학. 그해부터 조선어 교과과목이 폐지되어 일본어만으로 수업을 하였다. 그러나 마을 머슴 대길이 아저씨로부터 <언문>을 배워 신식 연애소설을 마을 아저씨들을 통해서 빌려다가 탐독을 하였다. 1945 8·15해방으로 월반, 해방 직후 새로 부임한 교장이 친일파라 해서 교내 동맹휴학을 하는데 주모자의 하나가 되었다. 신설된 군산 사범학교 입학시험에서 성적은 단연 우수했으나 동맹휴학사건 때문에 품행문제로 불합격 처분을 받고 다음해 군산중학교에 5백 명 중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어느 날 학교와 집 사이의 길에서 시집《한하운시초》를 습득, 그 시집을 밤새도록 읽고 문학적 충격을 받게 되었다. 1950 6·25전쟁으로 4학년 휴학하고 3개월 동안 강제 동원되어 밤에는 인민군의 명령으로 비행장 강제노동, 미군의 함포사격, 폭격 등으로 파손된 활주로 복구 작업을 하였다. 9월 수복 전후 동족상잔의 참극에 의해서 정신착란 상태가 지속되고 자학증상이 깊었다. 화장을 하고 다니고, 군산항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일본인 항해사가 건져 내었다.
1952년에 혜초라는 스님을 만나 불교 승려가 되었다. 스님의 상좌가 된 이래 12년 동안 선정을 닦고 불교도나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행동들을 행하였다. 보다 깊은 불법의 심연에 빠지고자 한쪽 귀에 청산가리를 들어부었던 시도는 왼쪽 귀의 고막이 녹아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70년대말 고문에 의해서 한쪽 귀마저 망가져 인조고막을 달아야 했다. 1958년 시 <폐결핵>을 친구인 나병재(羅丙哉)가 투고해서 조지훈 등의 천거로 한국시인협회 기관지 <현대시>에 발표되면서 시단에 나왔으며, 이어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 등이 서정주의 추천으로 발표되었다. 1960년 시집《피안감성彼岸感性》출간하였다. 1962년 중생제도에 대한 환상이 강해서 한국일보에 환속선언을 발표하고 환속하였는데 그 때문에 현실에서의 좌절이 몇 번 있었다. 제주해협에서 투신자살을 계획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음으로써 공동묘지에서 나날을 보낸 4년의 제주도에서 시집《해변의 운문집》출간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죽음에 대한 생각에 휩싸여 수면제를 먹고 깊은 골짜기에 드러눕지만 그날 예비군훈련이 있어서 예비군의 눈에 발견되어 병원에 실려 가서 살 수 있었다.
1970년 어느 식당에서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의 기사를 읽게 되고 그 사건의 목격으로 자아와 삶의 허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고은은 허무주의의 대표자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역사의식의 출발이 실현된다. 1974년 작가의 사회적·역사적 책무를 절감하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주요 실천 내용은, 사상·양심·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옥문인 및 양심수 석방·복권, 참된 민주사회 건설, 자주적인 통일, 참다운 민족문학 건설 등이다.
>를 백낙청, 이문구, 박태순, 염무웅, 이시영, 송기원, 조태일, 황석영, 신경림, 장용학, 등과 결성, 시집《문의文義마을에 가서》를 출간하였다. 1976년 노동 운동에 입문. 제품 불매운동, 단식투쟁, 시위와 노동시 낭독, 선언문 발표 등으로 여념이 없었다. 1977년에는 민주구국헌장사건 주모자로 약 1개월 동안 정보부의 지하실에 구속되었으며 그 뒤로 송광사에 유폐 당했다. 또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조태일과 함께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구속 취하로 석방된 일도 있다. 1983년 5월 5일 이상화와 결혼을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0이었다. 1986 <만인보(萬人譜)>를《세계의 문학》에 연재했고 1988 제3회 만해문학상 수상. 1994 경기대 대학원 석좌교수로 초빙되었다. 제1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 수상. 1996년 호주 작가 페스티벌 참석. 고은 시선《아침이슬》영어판 출간. 시드니 TV 특집 프로 한국시인 고은에서 대담 및 시낭독. 일본 오사카 중심 21 초청강연 및 시낭독. 독일 주어캄프사 주최로 프랑크푸르트, 뮌헨, 베를린 등 5대 도시 순회 시낭독. 독일 주요신문들 인터뷰. 네덜란드 로테르담 국제시인대회 참석. 대하서사시《백두산》5, 6, 7권을 출간하면서 완성하였다. 1998년 중앙일보 주관으로 북한 방문, 15일 간 북한 각지 문화와 자연 시찰. 북한에서 쓴 시를 분단 이후 최초로 팩스를 통해 직접 남한에 전달하였다. 1999 하버드대 페인홀에서<고은의 밤>행사. 시카고대에서 미국 10대 시인의 하나로 시낭독 및 강연. 미 UCLA, 버클리대, 하와이대, 캐나다 요크대학, 캘거리 등지에서 강연과 시낭독. 뉴욕에서 고은의 밤 행사 등을 하였다. 2000년 분단 55년 휴전 50년 만의 남북공존을 세계에 선포한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의 일원으로 방북하고 기념만찬장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시를 낭독하였다. 2007 《만인보》 24-26권 출간하였으며, 최근 2008년 9월에 시집 《허공》을 발간하는 등 왕성히 활동 중이다.
2. 작품세계의 변모와 특징
1) 초기시
고은의 초기시 경향은 첫시집 《피안감성》(1960), 《해변의 운문집》(1964), 《신, 언어 최후의 마을 처음엔 《제주가집》이였으나 후에 개명함.
》등이 있는데 이때의 고은의 시는 감상적 우울과 허무주의, 죽음과 재생 모티브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허무의 정서에 바탕을 둔 시작행위를 하고 있다. 생애 대한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 시적 자아의 형상에는 삶에 대한 의지나 집착보다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심미적 탐닉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시적 언어 역시 지나치게 탐미적이고 감상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정서의 편린을 표출하고 있다. ‘고은의 초기시를 규정하는 이러한 허무주의는 그 속에 강한 ‘에로스적 생명의지’와 ‘자기기해체의 묙구’가 틉입된 것일지라도 50년대라고 하는 역사의 비애와 마주쳐 시인으 자기 존재를 지켜가는 정신적 편향으로서 작용했다는 적극적인 의미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고은문학연구의 현황. 한원균(문학평론가). 112p
2) 중기시
1970년대 중반에 발표된 《문의마을에 가서》(1974), 《입산》(1977), 《새벽길》(1978) 등의 작품에서 그의 시 세계는 변모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본인 스스로 ‘전태일 분신사건’에 영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부터 시적 화자는 자기혐오나 허무감을 벗어나서 역사와 현실 앞에 자기를 똑바로 세우기 시작한다. 동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과 민중 중심의 역사관에 바탕을 둔 이러한 자기 인식을 통해 시인은 정의롭지 못한 현재에 대한 격렬한 투쟁의지를 노래한다. 대표작인 <화살>에서 잘 나타나듯이 투철한 현실에 바탕을 둔 자기 희생의 비극성과 전투성이 이 기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고은의 이러한 시적 변모는 이전의 시에서 볼 수 있었던 삶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생의 무상함에 대한 인식으로 변모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이때부터 고은 시작의 선종적 지사로서의 지향이 드러난다는 의견도 있는데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고은문학의 도적 변모 양상. 한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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