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블레즈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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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블레즈 파스칼(Pascal, Blaise)
※목 차※
1. 파스칼의 생애
2. 인식론의 특징:
1)기하학적 정신과 섬세의 정신 2)이성과 심정 3)전통과 권위 4)원리인식과 습관
3. 인간의 존재 상황
3-1. 불안과 비참 : 1)두 개의 무한 2)상상력 3)자애 4)모순 5)죽음 6)유희 7)인간의 정의
3-2. 위대함 : 1)생각하는 갈대 2)행복 - 영원한 행복의 가능성 3)내기
3-3. 비참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4. 도덕: 보편적 도덕
5. 파스칼 비판
6. 파스칼 철학의 영향사
1. 파스칼의 생애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1623년 6월 19일 프랑스의 클레르몽(Clermont)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에티엔 파스칼(Etiene Pascal)은 재정문제에 관한 소송을 판결하는 세무법원 판사로 있었다. 그의 누이가 쓴 ‘파스칼 생애’에 따르면 파스칼은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아주 적절하고 간결하게 대답을 했다. 또한 사물의 이치에 관한 질문을 던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 추리력은 그가 커가면서 더욱 풍부해졌고, 언제나 제 나이 또래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1626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버지는 더욱 가족을 소중하게 대했다. 특히나 외아들이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파스칼을 큰 애정을 가지고 키웠다. 다른 사람에게 그런 아들의 교육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스스로 파스칼의 교사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파스칼은 학교라고는 어디에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오로지 아버지를 선생으로 가졌다.
1631년, 그의 아버지는 은퇴하여 파리로 갔고, 그때 파스칼은 8살 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파스칼이 지식을 다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느 아이들보다 더 늦게 가르쳤다. 예를 들어, 라틴어를 더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열두 살이 되어서야 아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파스칼이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은 무엇이든 그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어쨌든 파스칼은 기이한 천재였다. 수학과 물리학 분야에 비범한 자질을 타고나, 이미 11, 12세 때 독한으로 유클리드 <원리>의 정리 제 32명제를 증명하여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16세 때는 데자르그의 사영기하학의 입장에서 쓴 ‘원뿔곡선 시론’으로 세상을 놀라게 함으로써 아르키메데스 이래 가장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다. 1631년 루앙으로 이주한 파스칼은 19세가 되자 징세관인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획기적인 ‘자동계산기’를 고안, 제작하기도 한다. 23세 때에는, ‘토리첼리의 진공실험’을 직접 시험해 보고, 진공이 생기는 원인을 대기의 압력으로 정리한다. 그러고는 다시 생각을 넓혀서 유체 탄력학 전체에 미치는 ‘수압기의 원리’를 발견하여 그때까지의 잘못된 학설을 타파했다. 이 같은 과학상의 업적은 파스칼의 일상생활과 결부되어 있었다. ‘자동계산기’의 발명도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였고, 나중에 확률론을 창시한 것도 도박을 좋아하는 한 친구한테서 판돈 분배법에 대한 질문을 받은 데에 기이한 것이었다. 1658년에 사이클로이드의 문제를 해결하여 적분법의 중요한 공식을 발견한 것도, 밤새도록 그를 괴롭힌 치통을 잊기 위해 몰두할 대상을 찾았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1646년, 파스칼은 ‘첫 번째 회심’을 경험한다. 유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네덜란드의 신학자 얀세니우스의 교리에 강하게 마음이 끌려 얀센주의에 귀의하게 된 것이다. 그 이듬해인 1647년에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그해 네덜란드에서 귀국한 데카르트의 방문을 받기도 하였다. 1651년 아버지 에티엥이 사망하고, 그 일년 뒤에는 그에게 이끌려 얀센주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17~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 된 종교운동이다. 얀센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부하고 신의 예정설을 채택 했으며 구원의 열쇠는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신의 은총이라고 가르쳤다. 포르-루아얄 수도원은 얀센주의 종교운동의 중심지였다.
에 들어갔던 여동생 자클린느가 오빠에 앞서 얀센주의의 본거지인 파리의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간다. 이 무렵 파스칼은 오히려 종교에서 멀어져서, 사교계에 들어가 당시의 사교계 인사들과 교류했다. 이 사교계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기하학적 정신’에 대비되는 ‘섬세한 정신’을 깨닫게 해 주었다. 1653년에는 <사랑의 정념에 관한 변론>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파스칼은 과학을 잊은 것은 아니어서, ‘도박’의 유희 문제에서 확률 계산법을 착상하기도 한다. 1654년, 사교계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신앙으로 돌아선 그는, 9, 10월에 즈음해 자주 수도원으로 자클린느를 찾아간다. 11월이 되어 파스칼은 ‘결정적 회심’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는 이 종교적 경험을 ‘불’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1655년 1월, 그는 마침내 포르루아얄 데상에 객원으로 들어간다. 이때 수도원의 지도자는 드 사시였는데, 이 무렵 <에팍테토스와 몽텐뮤에 관한 드 사시 씨와의 대화>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파스칼은 에픽테토스의 오만함과 몽테뉴의 회의론, 그리고 쾌락주의를 인간성의 모순으로 보고, 그모순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금욕적인 얀센주의는 세속적 그리스도교인 예수회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1656년에는 소르본 대학 신학부로부터 이단 판결을 받게 된다. 이에 파스칼은 익명의 공개 서한 <프로뱅시알> 18편을 잇따라 발표한다. 첫 번째 편지는 1656년 1월 23일, 마지막 편지는 1657년 3월 24일에 발표되었다. 그는 이 편지로, 신학적 문제에서 도덕론으로 옮겨가 예수회의 해이해진 도덕과 부패를 공격했다. 이 편지는 문학사에서 프랑스 고전주의 문체를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658년, 파스칼은 치통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몰두하던 사이클로이드 문제를 풀고, 적분법의 중요한 공식을 발견한다. 이 시기에는 평생 동안 계속되던 지병이 마침내 싶어져서 신앙이 그의 생활의 중심이 되어 갔다. 그는 <그리스도교 변증론>을 생각하고 그 초안인 단편원고를 쓰기 시작한다. 그것을 모아 진행한 것이 바로 <팡세>인데, 이 책은 그의 사후인 1669년에 출판되었다.
파스칼의 아버지는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종교에 대해 매우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은 이성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원리로서 그에게 가르쳐 주면서,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들려준 이 원리는 그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강력한 신앙심을 가지는데 기반이 되었다. 수학자, 과학자 다방면에서 위대한 이 천재는 모든 것을 깊게 탐구하는 동시에 종교의 모든 일에는 어린아이처럼 순종했다.
이 단순성은 종교 외에 다른 연구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심한 바로 그때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학적 문제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그의 모든 정신력을 기독교 도덕의 완성을 알고 실천하는 일에 쏟았다. 누이에 따르면 그는 자기가 전혀 할 수없는 다른 일들을 위한 것이 아니면 하인을 시키지 않았으며, 모든 시간을 기도와 성서 읽기에 투자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모든 주해서를 읽었다. 어렸을 때부터 종교에 대한 존경심 가운데 양육되었는데, 이 존경심은 그 당시 신앙의 모든 진리에 사랑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파스칼 앞에서 엉터리로 성서를 인용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이 진리에 대적하는 모든 것을 격파하는 일에 쉬지 않고 힘쓰도록 그를 인도했다.
2. 인식론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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