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해방 전후의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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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해방 전후의 교사
Ⅰ.들어 가기 전 설명
우리나라가 단기간에 엄청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교육에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만큼 교육은 우리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레포트에서 해방 전후의 교사가 되어서 우리나라를 바라보고자 한다. 여기서 가정할 교사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해 보자면 한일합병이 되었을 직후에는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는 인물이나 점점 조여오는 압박과 조선교육령 등으로 인해 점점 변해가는 교사이다. 그리고 이후 독립이 된 이후에도 나라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장면을 부각하려고 한다. 중요 사건 별로 그 교사의 감정 그리고 취했던 행동, 또한 왜 그런 행동을 취했는가에 대해 그 교사가 일기를 쓴 형식으로 표현을 해 볼 것이다.
Ⅱ. 일기장
1. 1922년 2월(1930년부터 하라고 하셨으나 심정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이 시기부터 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행복을 느낀 날이다. 그 이유는 바로 제2차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제1차 조선교육령이 공표된 이후에는 아이들에게 수업을 가르쳐도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내가 진정으로 이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실에 자괴감에 빠져있었다. 그 이유는 제 1차 조선교육령은 바로 식민통치에 부합되는 조선인을 양성하기 위해 실업교육에 중점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글을 가르치기 보다는 국어(일본어)를 가르치는데 중점을 두었었다. 비중으로 본다면 보통학교(오늘의 초등학교)에서 일주일에 수업을 26~27시간 하는데 이중 국어(일본어)를 10시간이나 가르쳐야 했고 조선어 및 한문은 6시간 밖에 가르치지 못했다. 즉, 우리나라의 독립보다는 일제의 앞잡이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발표된 제2차 조선교육령으로 인해 앞으로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이끌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이제부터는 각 학교의 교과목 중 종래에는 잠시 폐지되어있었던 조선어를 필수 과목으로 채택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언어를 마음껏 가르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종래 4년이던 보통학교의 수업을 6년으로 연장하였으니,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을 더욱 높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곧 우리나라에도 최초의 대학이 생긴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런 일제의 정책에 대해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 3.1운동으로 인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립을 원하는 열망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이런 열망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정책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개정교육령의 전반적인 목적이 일어의 보급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르쳐야 할 교육내용에 있어서 초·중등학교의 일본어 시간은 국어 시간의 2, 3배였으며, 보통학교에 일본역사와 일본지리·실업교과 등을 신설하여 일본문화를 주입하는 한편 저급의 직업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는 내용 때문이다. 제발 이런 나의 걱정이 괜한 걱정이었으면 좋겠다.
2. 1938년 3월
이럴수가........ 저번에 한 나의 걱정이 여러 측면으로 보았을 때 관한 걱정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아니 우리나라 전체가 일제에게 농락을 당한거란 말인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지고 분하다. 지금 이 일기를 쓰는 것조차 종이를 찢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제2차 교육령은 우리나라에게 더 많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 아니었다. 이 때의 교육제도는 융화정책을 통해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고 우리 민족의 사상을 일본화 내지 말살하려는 데 있었을 뿐인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1923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도 우리의 고등 교육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경설제국 대학은 1920년 6월 100여 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재단법인 조선교육회를 발기하고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여 종합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자, 이에 일제가 한국인의 고등교육기관을 봉쇄할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햐면 이 학교에는 조선 사람의 독립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정치·경제·이공 등의 학부는 설치되지 않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문학부·의학부만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교수와 학생의 구성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조선인은 일본인과 차별을 받아 1926년 개교 당시 조선인 교수는 전체 57명 중 5명, 학생은 150명 중 47명에 불과했다. 정말 교육자로써 이런 일제의 술책도 눈치를 채지 못하다니 내 자신이 부끄럽다. 그런데 이번에는 완전 일제가 들어내고 우리나라의 교육을 깔아뭉개려 한다. 바로 제 3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한 것이다. 제 3차 교육령의 내용을 보면 조선어를 필수 과목에서 수의과목(隨意科目)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결국 조선어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그나마 형식적으로나마 가르칠 수 있었던 한글을 이제는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1937년 황국신민의 서사가 발표되고 이를 암기해야하는 등의 황국신민화 교육이 시작된다. 아~!!! 솔직히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런 교육을 가르쳐야하는 공교육 쪽에서 일을 하기가 싫다. 대신 우리나라에 필요한 진정한 인재를 기를 수 있는 만주에 있는 사립학교에서 교사로서의 진정한 교육을 하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족들이 있다. 나는 우리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공교육 쪽에서 일을 하면 먹고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진정한 교육을 위해 이 길을 포기한다면 우리 가족의 부양은 장담할 수가 없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
3. 1943년 3월
저번 일기를 쓴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나의 생각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바로 학생을 계몽시키고, 독립을 위해 교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계를 우선시 하고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마음을 잡았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은 나의 이런 생각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 3차 조선교육령이 발표된 후 5년간의 나의 생활을 봤을 때 이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나라가 독립하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우리의 가족부터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젊은 학생들을 계몽시키고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해 외치더라도 우리나라가 독립이 될 가망성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 같아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기로 했다. 그리고 항상 일제에 복종하고 우리민족에 대한 폄하하는 내용을 가르치다보니 결국 나 자신도 거기에 동화된 것 같다. 이런 생각을 가진 나에게 일제가 또 다른 임무를 부여하였다. 바로 제4차 조선교육령의 발표로 인해서 주어진 임무이다. 이 때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전면 금지 됐지만 이제는 아무런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고 국민 학교는 대륙침략에 이용하는 병사의 준비와 관련해서 의무교육제의 준비를 실시하고, 중학교는 일본에 준해서 조처해야하고 , 제국대학 예과는 문과의 정원을 최소한으로 감소시키고 이공과의 정원을 증원시켜야하고, 이과계통의 전문학교는 학생 수를 증가해서 실시해야하고, 문과계통의 사립 전문학교를 이과계통의 학교로 바꾸는 동시에 잔여 문과계통의 전문학교는 통합해야하고, 문과계통의 여자전문학교는 여자실무자나 여자지방보도원의 양성으로 전환할 것 등과 같은 내용의 임무가 주어졌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학생들을 꼬드겨 전쟁에 참여하도록 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이미 1941년 말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김활란 :이화여대 이사장)으로 창씨개명을 한 인물과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다. 그 활동의 예를 들자면, 부인궐기촉구 강연, 결전 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일을 하였다. 이 때 야마기 카쓰란은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기도 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 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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