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포스트모더니즘과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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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환상
서론
환상은 우리가 무의식에서 원하는 세계 즉 실재계와 교섭할 때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현실을 대변한다. 그런 환상의 특성상 환상은 시대가 변모함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이번 장에서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시대에서 환상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는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 조건들과 비교하면서 알아보도록 한다.
1. 파시즘·후기자본주의·탈근대 - 향락에서 탈주로
모더니즘의 낯선 두려움에는 세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소외된 주체의 ‘화해된 소망’이 깃들여 있다. 또한 그 미학적 환상의 욕망(화해의 소망)과는 반대되는 욕망에 근거한 환상도 나타나고 있다. 즉 실재계의 침범에 대응해 억압적·모순적 세계의 균열을 봉합하려는 환상인데, ‘정치의 미학화’라는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후기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그런 파시즘의 환상과 연관이 있다. 또, 서구적 근대를 넘어서려는 점에서 파시즘과 후기자본주의, 포스트모던 미학은 서로 연관을 지닌다. 그럼 이제부터 그들의 관계를 살펴보자.
먼저 파시즘에 저항한 모더니즘의 환상 미학과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관계이다. 모더니즘의 미학적 환상과 파시즘의 환상의 공통점은 실재계적 요소와 교섭한다는 점이다. 해결이 불가능한 상징계 차원을 넘어서서 실재계와 교섭할 때 우리는 향락을 경험하게 된다. 향락의 경험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미학적 환상과 파시즘의 환상은 비슷한 점이다. 그러나 미학적 환상은 실재계와의 교섭을 통해 세계(상징계)의 전복을 암시하는 (미학의 정치화) 반면, 파시즘의 환상은 실재계적 요소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억압적 세계를 더욱 완전하게 만든다(정치의 미학화). 전자에서는 향락(실재계와 교섭)의 경험이 세계로부터의 ‘탈주의 욕망’이지만, 후자의 경우 향락은 더 넓혀진 (억압적 세계의) 영토 안에 ‘자발적으로’ 예속되게 만드는 유혹의 미끼이다.
파시즘은 내선일체와 나치 같은 폭력성을 가진 형태로도 나타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상징계(식민지, 서구적 근대)의 모순과 균열을 은폐하는 환상을 매개로 한다는 것이다. 환상은 무의식적 욕망이 실재계와 교섭할 때 나타난다. 파시즘은 무의식 속 심리적 잔여물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상징계를 넘어서서) 실재계와 교섭하는 동시에 더 넓어진 상징계의 영토로 되돌아온다. 이처럼 향락과 실재계적 경험을 미끼로 더 확대된 영토로 유인하는 과정에서는 상징계의 균열이 감춰지는 환상이 작용한다.
물론 이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과정은 상징계의 균열을 드러내고 실재계와 대면하는 미학적 환상과 정반대의 운동이다. 전자가 균열을 은폐하는 환상(스크린)을 통해 억압적 상징계를 공고히 한다면, 후자는 실재계와 대면하는 방식으로 상징계에 전복의 위협을 알린다.
하지만 파시즘의 한계는 그 같은 근대의 초극을 연출하는 선전도구가 주로 담론의 방식이라는 점이다. 가령 강연과 구호, 논설, 그리고 파시즘시기의 동양론 등은, 담론의 차원의 이데올로기적 선전도구였다. 이데올로기적 담론은 조선인을 열등하게 정형화하면서 황국신민을 감격어린 언어로 찬양했다. 그처럼 근대를 초극하려는 향락의 유혹은 사람들을 파시즘의 영토로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파시즘이 고안해낸 향락을 앞세운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후기자본주의시대에도 계속 사용된다. 그러나 후기자본주의가 전시대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담론보다 이미지와 시뮬라크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란 연출된 것인 동시에 실제 삶의 일부를 이루는 이미지를 말한다. 이데올로기가 삶 자체의 이미지로 작용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시대처럼 여전히 파시즘 같은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지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이데올로기는 마치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투르먼 쇼>에서 시뮬라크르(연출-현실)는 투르먼만이 경험하는 현실이지만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도 그것을 경험한다.
후기자본주의가 파시즘과 구별되는 또 다른 점은 희생양을 공격하는 만큼 악의 세력과 싸우는 쪽을 영웅화하고 미화시킨다는 점이다. 부드러운 이미지, 진짜로 일어나는 연출된 삶, 달콤하게 미화된 승리의 서사 - 이 모든 것들은 모더니즘 시대의 균열과 악몽을 미리 예상해 후기자본주의가 향락의 열망을 지닌 사람들에게 (악몽을 잊도록) 선물하는 환상적인 기획물이다. 모든 것을 잊게 하는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이 후기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슈퍼맨, 신데렐라, 스노 화이트 같은 영화나 동화의 환상이 현실 자체에서 공연되는 일에 다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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