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룡 - 생애와 문학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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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南隅 (남우) 박성룡
Ⅰ.생애와 문학 활동 (1930 ~ 2002)
전남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살길을 찾아 일본에 건너갔던 그의 아버지는 해방 후 귀국했으나, 특별히 하는 일없이 소일하며 늘 술에 취해 살았다. 어린 아들에게 “너무 허망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가 13살 때 운명하였다. 그의 시적 정서의 토대가 된 감성적 기질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이며, 후의 아버지의 부재는 그의 심성을 관조적인 것이 되게 했으며, 그 관조는 거시적 안목으로 옮아가 시적 풍격의 형성에 이바지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을 조그마한 어촌에서 보냈고 철이 들 무렵 광주로 이사를 했는데 4년 정도나 뒤늦은 출생 신고 때문에 취학을 할 수 없어서 또래들이 4학년이 되었을 때에서야 1학년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 전, 2년 동안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게 된 것은 입학 전의 이러한 공백기 탓이다.
광주서석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입학자격검정고시에 합격하여 광주서중으로 진학했다. 중학시절 박성룡은 풍경화 그리기에 몰두하던 화가 지망의 소년이었다. 어린 시절 그의 그림 그리기 체험은 그의 시에 영향을 주어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시적 이미지의 능숙한 사용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광주고와 중앙대 영문과로 진학했고 대학교는 가난해서 등록금의 압박으로 인해 중퇴하였다. 그가 문학 청년기를 보낸 1950년대를 전후한 기간 동안 광주에는 피난 온 서정주, 김현승 등이 머물고 있었는데, 이들 밑에는 시작의 열정을 지닌 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박성룡도 그들 중 하나였다.
『문학예술』지에「교외」(1955),「화병정경」(1956) 등으로 조지훈과 이한직의 추천을 통하여 시단에 등단하였다. 조지훈의 이래적인 칭찬은 그에게 큰 격려가 되어주었다. 1962년 1월, 정한모교수의 소개로 만난 카톨릭 신자인 이애영 여사와 결혼하고, 자신도 세례명을 받았다.
박성룡은 오랜 기간 언론사에 봉직했다. 출판사와 신문사를 전전하다가 서울신문 문화부에서 문학 미술담당 기자와 부장으로 정년을 맞고 퇴임하기까지 그는 출판 언론계 주변에서 30여년을 몸담았다. 앞서 말했듯이 평소 그림을 좋아했고 이에 대한 안목도 남달라 그림에 대한 감상의 글을 많이 썼다. 40여 년 시작 활동 기간 동안 개인 창작시집으로는 모두 6권을 남겼다.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1969),『춘하추동』(1970),『동백꽃』(1977),『휘파람새』(1982),『꽃상여』(1987)『고향은 땅끝』(1991)이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시로 쓰고 남은 생각들』(1978)을 남겼다.
Ⅱ. 시기별 작품경향
초기시는 주로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이는 625 전쟁 체험에 의한 것이다. 전쟁은 시인에게 인간의 무모성과 유한성을 인식하게 하는 반면 자연의 무한성을 깨닫게 하였다. 이로 인해 자연과의 동일화를 통해 영원한 생명력을 지향한다. 이런 시인의 사상적 기저에는 일원적 사유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작고 사소한 사물의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통해 드러난다.
중기는 시인의 현실에 대한 직시로 시적 소재가 인간사로 확대된다. 자신의 일상적 삶을 통해 소시민들의 보편적 삶을 통찰한 객관화된 서정을 보여주며 민족문학대계 작업에 참여하면서 우리민족에 대한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을 새롭게 각성하고 역사적 현실에 관심이 증가되면서 시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을 자각한다.
후기시는 노년으로 접어든 시인은 늙는 것을 실감하고 죽음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인식은 생에 대한 허무의식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시인은 자아성찰을 통한 삶에 대한 순응주의적 자세로 이를 극복한다. 이 순응주의적 자세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죽음에 대한 달관적 태도도 가능해 진다. 죽음에 대한 달관적 태도는 근원적 고향에 대한 의문과 향수를 불러오고 이는 고향으로의 회귀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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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성룡 분석
  • 문학청년기를 보낸 1950년대를 전후한 기간 동안 광주에는 피난 온 서정주(당시 조선대 교수로 재직), 김현승 등이 머물고 있었는데, 이들 밑에는 시작의 열정을 지닌 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박성룡도 그들 중 하나였다. 전남 광주에서 동인지 《영도》의 발간과 함께 시작활동을 시작하였고 그해 12월 이한직 시인에 의해『문학예술』지에 (1955)가 제1회 추천을 받았으며, 1956년 4월 로 2회 추천을 받았으며, 같은 해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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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성룡은 오랜 기간 언론사에 봉직했다. 출판사와 신문사를 전전하다가 서울신문 문화부에서 문학 미술담당 기자와 부장으로 정년을 맞고 퇴임하기까지 그는 출판 언론계 주변에서 30여년을 몸담았다. 앞서 말했듯이 평소 그림을 좋아했고 이에 대한 안목도 남달라 그림에 대한 감상의 글을 많이 썼다. 40여 년 시작 활동 기간동안 개인 창작시집으로는 모두 6권을 남겼다.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1969),『춘하추동』(1970),『동백꽃』(1977),『휘파람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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