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이승만과 김구의 해방 후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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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승만과 김구의 해방 후 갈등
1. 서 론
해방 이후에 남한사회에 국한해 본다면 우익 내부의 의견 합일과 힘의 결집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것이 결국은 불필요한 힘의 낭비를 초래하면서 해방 정국은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해방 이후에 남한 사회의 정치세력을 거론함에 있어서 가장 자주 등장하고 중요한 인물이 김구와 이승만일 것이다. 해방 정국에 있어서 이승만과 김구의 생애와 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이 두 인물간의 제휴와 갈등 그리고 현대사, 특히 분단의 전개 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생각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승만과 김구는 각기 자신의 정향과 노선에 따라 민족해방과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치열하게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동일한 목표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그들을 갈등의 관계로 만든 것이다. 과연 이승만과 김구의 어떠한 차이가 그들의 갈등을 만들었고 그러한 갈등은 해방 후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 김구와 이승만이라는 인물과 두 인물간의 갈등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더욱 심도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2. 인물, 사건 조사
1) 대립의 원인 : 신분과 학문 차이
이승만과 김구의 대립의 원인을 그들에 갈등이전에 그들의 성격과 정치성향의 밑바탕이 된 그들의 신분과 학문의 차이를 통해 찾으려고 한다. 이승만과 김구는 신분적으로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승만은 양영대군의 후손으로서 왕족이라는 과도한 우월감으로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는 자신이 왕실의 후손임을 강조함으로써 멸망한 왕조에 대한 민중의 전근대적 연민에 호소했다. 그가 평소 ‘왕손’, ‘나의 백성들’ 등의 용어를 즐겨 썼다고 하는 사실은 그의 외형과는 상관없이 그가 유교적 권위주의에 얼마나 깊이 매몰되어 있었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반면에 김구는 역전의 후손으로 멸문의 화를 피해 달아난 가문의 후손이었다. 김국는 17세에 동학에 입도했다. 그가 입도한 동기는 역적의 후손이라는 응어리와 과거에 낙방한 좌절감이 개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김구는 자신의 신분적 열등감으로 자신을 낮추고 자제하는 겸손한 정치 정향으로 표출되었다. 1919년 상해 임정을 방문하여 내무총장 안창호에게 문지기를 자청한 것은 평생 그의 정치 성향을 규정하였던 상놈이라는 열등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리고 후에 임정의 주변 사람들이 백범의 국무령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백범이 “해주 서촌에 미천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고 사양하였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러한 신분적 차이 외에도 이승만과 김구는 현격한 학문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결혼 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의 오랜 미국 생활 중 주목할 것은 그가 정치 지도자로서의 정치 기술을 체득하였다는 것이다. 하와이에서의 투쟁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살아남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생존 기술을 체득하게 하였고,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관용을 보이지 않는 냉혹함을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투쟁력이 그가 후일 임정의 수반으로서나 해방 정국의 정치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합리적인 민주주의자로 보이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독선과 술수의 정치 형태를 보여 주는 요인이 되었다. 이승만의 미국 생활은 그의 정치 정향이 엘리트주의적 속성을 보이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들어서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있던 미국은 이승만에게 대화와 타협에 의한 정치 기술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의 정치 활동은 미국의 여론과 의회, 그리고 정부 당국자들을 설득시키는 한편, 언론에 글을 기고함으로써 미국 독립의 여론을 확산시키는 온건한 투쟁 방식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의 독립은 외교에 있다”고 주장하여 독립 운동의 전략으로 외교제일주의를 고수하였다.
반면에 김구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것이 전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정치 정향은 이승만에게서 볼 수 있는 자신감과 엘리트의식은 찾아볼 수 없는 대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려는 강직한 마음은 언제나 강하게 나타나서 그의 정치 정향을 규정하는 주요 인자가 되었다. 따라서 김구의 신분적 학문적인 열등감은 왕족 출신인 이상만의 우월감이나 엘리트 의식과 비교하여 좋은 대조가 된다. 이러한 대조는 그들의 관계를 규정지었는데,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과 정국주도권을 두고 경쟁 관계였으면서도 자신의 노선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그에게 1인자의 자리를 양보하고 2인자로서 만족하는 듯이 보였던 것이다.
2) 해방 정국에서의 갈등 : 노선싸움
이승만과 김구의 해방 정국에서의 구체적인 갈등은 크게 친일 잔재의 처리 문제, 신탁통치 문제, 단일정부로의 갈등으로 나누어서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은 앞에서 이야기한 그들의 신분과 학문의 차이가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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