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518광주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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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518광주민주항쟁
Ⅰ. 5·18의 배경
1.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
1970년대는 박정희의 장기집권야욕으로 인해 사회전반에 억압된 학생, 노동자 민중들의 기본적인 인권의 충족요구가 등장했던 시기였다.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전태일 분신 사건: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서울 중구 청계천 6가 피복 제조상인 동화시장 종업원이었던 전태일이 작업장 안의 시설개선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려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자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기도, 이날 밤 10시께 숨졌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경이적인 산업성장은 노동자들의 참담한 저임금구조를 희생으로 한 것이었다. 전태일은 지난 10월 7일, 청계천 5~6가 동화시장, 평화시장, 통일상가 등 4백여 피복 제조상의 작업장 시설을 근로기준법에 맞게 개선해 달라는 진정서를 노동청에 냈으나 두달이 넘도록 아무런 시정도 없어 이날 낮 1시 20분, 3개 시장 재단사 친목회 회원 10여명과 함께 시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려 했다. 전태일 등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미리 출동한 경찰에게 뺏기자 전태일 혼자 평화시장 앞길에서 분신자살을 기도한 것이다.
으로 포문을 연 1970년대는 우리시대 노동운동의 서막이었으며, 이후 YH사건 YH사건: 가발수출기업인 YH무역의 노동자들이 일으킨 분규. 79년 회사의 부채와 적자운영,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 등을 이유로 회사가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함에 따라 폐업철회와 임금청산,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농성이 시작되었다. 회사가 기숙사, 식당까지 폐쇄하자 YH 노동자들은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결정하였다. 79. 8. 6일 회사가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하자 9일 YH 무역 노동자 200 여명이 신민당사에서 회사의 정상화와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농성투쟁을 시작하였다. 11일 1천여 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경숙(21세, 노조 집행위원)이 사망하고 신민당 의원과 당원, 취재 중이던 기자 등이 경찰에 구타당하여 중경상을 입었다. 경찰은 여공 172명과 이를 제지하려던 신민당 당원 26명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이 여파는 신민당의 극한적인 대정부 투쟁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으로 이어졌고 YH사건의 배후 불순세력으로 지목된 기독교세력과 청년, 학생세력 등 전 사회세력의 반유신 연대투쟁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유신독재정권의 종말을 앞당기게 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으로 인한 김영삼의 제명, 이은 부마항쟁 부마항쟁: 79년 10월 16일~19일 부산과 마산지역에서 학생들의 유신철폐와 독재타도시위가 자연발생적으로 시민들과 노동자들의 전면적인 대중항쟁으로 발전한 항쟁. 그 배경으로 경제침체와 소득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YH사건과 김영삼 의원의 제명사건을 계기로,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음을 들 수 있겠다.
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탄압이 지속된 형국이었다.
이와 중에 유신체제를 맞이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된 민주진영은 1970년 후반에 이르면 그 불만이 고조되어갔다. 이에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민주화운동을 벌여나갔지만, 학생과 재야인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인혁당사건 인혁당사건: 박정희의 긴급조치에 반대하여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민청학련)를 북의 지도를 받는 인민혁명당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해 관련자들을 사형시킨 사건. 이들은 75년 대법원에서 상소가 기각된 지 20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집행을 당하는 등 대표적 사법살인의 예로 꼽힌다. 인혁당사건은 학생운동과 재야를 탄압하기 위한 조작사건의 성격이 짙다.
등을 꾸미는 등 박정희독재가 끝날 때까지 탄압을 지속하였다.
2. 10·26사태이후 정국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박대통령의 18년 독재체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는 오랜 기간 한국의 민주정치세력이 말살당해온 상태에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닌, 독재체제내부간의 균열로 인한 갑작스러운 권력공백이었다. 때문에 민주세력은 충분히 단결하고 대처할 시간이 부족했다. 2김(김대중, 김영삼)은 분열 김대중과 김영삼은 1980년 4월 4일에 만나 신민당과 재야의 통합협상을 벌였지만, 7일 협상결렬을 발표했고, 이후 각자의 길을 감으로써 신군부의 집권을 용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이 분열엔 둘다 책임이 있겠지만, 근본적 이유는 김영삼이 김대중에 비해 탐압을 덜 받은 덕분에 갖게 된 제도권적 우위를 십분 활용하려고 한 반면, 김대중은 그걸 불공정경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도 그랬지만 신군부가 양김을 차별대우한 것도 이러한 분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강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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