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해방이후의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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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Ⅰ. 우사 김규식
우사 김규식의 생존시대인 1880년대에서 1950년대에 결치는 시기는 우리 역사의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김규식은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타국에서의 편안한 삶을 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규식은 편안한 길을 택하기보단 남이 선택하지 않은 길을 고집했다. 그는 과연 무엇 때문에 힘든 길을 자청한 것일까.
1. 해방이전의 김규식의 활동
1) 김규식의 독립운동노선은 무엇인가
식민지 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은 독립국가를 세우는 방법을 두고 여러 가지 노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첫째, 미국을 비롯한 국제열강의 도움을 받아야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고 본 외교독립노선이 있었다. 둘째, 식민지시대는 백성들의 지적 문화수준이 낮아서라고 생각해 백성들을 일깨워야 한다고 한 애국적 문화계몽운동노선. 셋째,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독립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선 우선 경제적 실력양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 넷째, 계급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라 주장하며 노동운동이나 소작농운동을 전개한 사람들. 다섯째, 무장력을 가지고 직접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 항일무장투쟁세력이 있다.
이들 중 우사 김규식이 선택한 노선은 대체로 첫째인 외교독립노선이라고 흔히들 생각되고 있다. 전 세계에 한국의 현실을 폭로하기 위해서 김규식이 참석한 파리강화회의라든지, 김규식이 구미위원부 위원장까지 맡았다는 사실은 그가 충분히 외교독립노선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까닭은 그 이후의 우사의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우사는 계급해방을 주장한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조선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기도 했고, 무장투쟁을 주장한 ‘조선의열단’과 손을 잡기도 하여 폭넓은 독립운동노선을 걸어왔다. 그러므로 그를 외교독립노선이라는 틀에 얽매여 놓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념적 성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기독교 장로출신인 그의 경우 대체로 순수 우익노선을 갈 것만 같지만, 모스크바에서 열림 극동민족대회에 고려공산당 후보당원으로 ‘변신’해서까지 참가한 그를 본다면 그는 적어도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는 이데올로기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민족해방운동 그것에 더 큰 도움이 된다면 밖으로는 어느 나라 누구와도 협력하며 민족해방운동전선 내부에서는 어느 세력과도 연합할 수 있다는 민족해방운동의 폭넓은 방법론을 터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런 상황에 따른 융통성있는 민족해방운동은 혹자에 의해서 회색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너무나도 변동이 심했던 국제정세를 미루어본다면 가장 합리적인 운동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2) 파리강화회의에서의 활동
“1918년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파리강화회의에 가서 적어도 조선문제를 전세계에 폭로, 항변해야겠다고 결심함. 자금을 조달하고 각계각층에 전국적인 시위운동을 선동하도록 하기 위해 두 사람을 조선에 들여보냄.....” - 김규식의 <자필 이력서>
위 내용을 보면 김규식은 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것을 결정하기 전에 이미 스스로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여 조선문제를 전세계에 폭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자금을 조달하고 전국적 시위를 선동하기 위해 밀사를 국내에 파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김규식 단독행동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조직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김규식은 여운형 등과 만나기 이전에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조선문제를 제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한반도 강제점령을 전후하여 국제사회에 대해 한국민족이 자치능력이 없으며 그것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기 어려운 원인이라 선전하고 한반도를 강점하는 핑계로 삼았다. 김규식은 이러한 전후사정을 알고 탄원서에 한국민족이 자치능력을 가진 민족임을 강조했다. 또한 일본의 침략이 한반도 뿐만 아니라 장차 중국대륙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구미제국주의와 일본제국주의 사이의 이해관계가 대립되어가고 있으며, 장차 그 대립이 심화할 것이라는 점을 어느 정도 내다본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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