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에 대한 대책과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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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동북공정에 대한 대책과 논의
1. 들어가며…
중국정부는 사회과학원 산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2002년 2월 이른바 동북공정의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아래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 부여, 발해, 간도, 현재의 한국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중국은 이미 오래 전에 발해를 자국의 역사로 규정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해서는 달랐다. 몇 년 전만해도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이른바 ‘일사양용’이라는 것이었다. 즉 같은 고구려사를 두 가지로 동시에 사용한다는 뜻으로, 고구려서가 중국사도 될 수 있고 한국사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서기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기 전까지의 고구려사는 중국의 역사이고, 평양 천도 이후는 한국사라는 것이다. 이것이 최소한 동북공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중국의 고구려 역사 인식이였다. 그런데 동북공정을 계기로 ‘고구려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식으로 바뀐 것이였다. 물론 손진기등 일부 중국 학자들은 동북공정 이전부터 “고구려사는 중국사”하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별적 견해였을 뿐 통설은 아니였다. 그랬던 것이 동북공정이 시작되면서 중국의 공식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광개토 대왕이 중국인이라고?」 pp. 28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감정적으로 흥분해서는 안된다. 일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는 중국의 입장과 우리의 현실을 통찰하고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주장하는 근거와 중앙 정부 차원에서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역사 왜곡에 나서는 궁극적인 이유를 알아보고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알아보려 한다.
2. 중국의 주장 VS 한국의 주장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는 고구려 문제라 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중국이 고구려사를 귀속시키는 논리를 살펴볼 수가 있다.
1) “고구려는 중국경내의 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다.”
- 중국의 주장: 고구려 정권은 남하한 일부 부여족 일파와 전한시기 고구려현 경내의 기타 변강 민족이 공동으로 건립하였고, 후에 옥저, 동예, 소수맥 등의 기타 예맥족, 한인, 선비인, 숙신인 등의 민족 성원이 더하여져 점차 융합하여 고구려 민족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구려정권을 구성한 민족은 여럿이었던 것으로 이들 민족의 원류 역시 모두 전한 시기에 동북변강지구에서 활동한 민족이었고, 일찍이 주나라 때에 중앙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전한 시기에는 전한 현도군에서 활동하였고 전한 왕조의 관할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정권은 건립 초기부터 서한이 직접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 한국의 반론: 현재의 중국강역으로 보면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이나 국내성은 분명 중국의 경내에 있었다. 그러나 건국당시에는 이들 지역이 중국의 경내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사를 건국한 세력은 압록강 남쪽에도 있었다. 과거의 평안북도 자성군, 만포시, 위원군, 초산군, 시중군에 분포하고 있는 수많은 적성총들은 압록강 남쪽 세력과 북쪽세력이 함께 고구려를 건설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는 과거나 현재 어디를 기준으로 해도 중국 경내 세력만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였던 것이다.
2) “고구려는 한사군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중국의 주장: 고구려의 수도가 흘승골성-위나암성-환도성-평양성-장안성 등으로 옮겨졌지만 그 활동 중심이 중국 동북과 한반도 북부에 한정되어 현도, 낙랑, 임둔, 진번의 한사군의 관할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반론: 한사군이 모두 설치된 것은 기원전 107년이고, 임둔군과 진번군은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고, 현도군은 기원전 75년에 고구려의 저항을 받아 흥경 노성방면으로 쫓겨갔다. 고구려 남쪽에 낙랑이 있었다고 하지만 <한서> 지리지에 6만 2,812호, 40만 6,748명이 있던 인구가 <진서> 지리지에는 낙랑군 3,700호, 대방군 4,900호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한사군의 영역이 아주 축소되어 극히 좁은 지역만을 지배하다가 축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30년 정도 한사군의 범위 안에 있었던 것을 가지고 줄곧 그러하였다고 설명함은 잘못이다. 몽고족이 원나라 때 중국을 지배한 것을 두고 중국사는 모두 몽고사라고 한다면 중국은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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