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폭군인가?(광해군의생애, 광해군일기편찬과정,나의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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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
광해군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난 후 광해군 일기가 어떤 수난을 겪으며 편찬되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인조반정 정당화와 관련하여 광해군이 폭군인지 성군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차를 보시면 어떤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가 알수 있을 것인데여 이것과 더불어 3가지 항목을 짧게 정리한 요약본도 있습니다.
목차
1. 광해군의 생애

2. 『광해군 일기 (光海君日記)』의 편찬 과정.

3. 광해군, 그는 과연 폭군이었는가. (나의 견해)
본문내용
조선시대에 왕으로 즉위했으나 군(君)으로 강등된 임금은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 이들 셋이었다. 이중 노산군은 후에 숙종에 의해 단종으로 복위가 되었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끝내 `군`으로 남았다. 역사상 폭군으로 일컬어지는 광해군, 그는 정말 『광해군일기』에 기록되어 내용처럼 폭군의 모습을 한 임금이었을까? 그리고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글들을 적혀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할까? 본 보고서에서는 광해군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광해군일기』는 어떤 과정을 거쳐 편찬되었는지, 그리고 광해군이 정말 폭군이었는지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하는 데에 목표가 있다.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조정의 일부를 이끌며 소임에 최선을 다했으며, 임금이 된 후에는 외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론을 폈고 내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재정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전란 중에 타버린 궁궐을 창건?개수하여 왕실의 위엄을 살렸으며 선혜청을 설치하고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민간의 세무 부담을 줄여주었다. 하지만 대북파와 서인간의 당쟁이 원인이 된 인조반정에 의해 폭군으로 전락되고 폐위 당한다.
『광해군일기』는 총 64책으로 광해군 재위 15년 1개월 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의 생애만큼 그 편찬 과정이 순탄치 못했던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되었고, 재정상의 문제와 전란으로 인해 결국 인쇄되지 못한 채 전하고 있어 오늘날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광해군일기』는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중초본과 정초본이 남아있는 실록으로, 중초본은 먹 또는 붉은 먹으로 수정하여 삭제하거나 보충한 부분이 많아 실록의 편찬 과정 및 작성자의 편찬태도 등을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룬다.『광해군일기』만을 본다면, 그리고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판단한다면 광해군은 분명 폭군이라고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이성무,『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동방미디어,1999.
박영규,『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들녘,1996.
상종열,『(도해)조선왕조실록』, 이다미디어, 2002.
서정우,『이야기 조선왕조사』,푸른숲,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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