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서평] 당후반기 진사과와 사인들간의 사적유대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04.07.26 / 2019.12.24
  • 6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97)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1,1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목차
Ⅰ. 머리말
Ⅱ. 지공거와 진사과 급제자의 관계
Ⅲ. 진사과 출신자들의 집단성
Ⅳ. 당후반기 사인들의 상호 유대관계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머리말
우리의 생각 속에 과거제도는 ‘실력위주’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다닌다. 그러나 처음 본고를 대했을 때 진사과를 둘러싼 사인들간의 사적 유대관계에 관한 주제를 보고 관심이 갔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 나라의 정치실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게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난 이후 몰락하는 대구부산 지역과 신흥 ‘부흥’을 맞이한 광주 지역 일대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정치계 인사들의 많은 수가 전라도 출신으로 물갈이 한 것 또한 대통령과의 끊을 수 없는 ‘유대관계’때문이 아닌가? 이처럼 나는 유대관계에 관해서라면 당시 정치계의 부패상을 관찰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 논문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고는 본인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었다.
隋․唐 統一帝國의 성립과 더불어 성립된 科擧制度가 중앙집권적 관료 선발제도라는 것과 이 가운데 문학적 소양을 주로 평가하는 진사과는 매우 중요한 과목이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사실이다. 실제로 進士科 출신자들은 점차 唐朝의 대부분 요직을 독차지하였으며 송대 이후의 과거가 진사과 단일체제로 전개되어 간 것도 이와 관련성이 깊다. 그러므로 唐代史나 科擧制度史와 관련하여 이 시기 進士科의 이해는 긴요한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진사과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당시 이를 둘러싼 士人들의 紐帶關係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진사과는 사인들이 入仕수단으로서 효용이 컸고, 관료 선발제도로 현실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당후반기 진사과의 실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사과를 둘러싼 사인들의 동향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진사과는 붕당의 성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실제로 황제가 조정의 붕당을 없애기 어렵다고 한탄했던 이 시기는 관료들이 자신들의 사적 결속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진사과를 깊이 이해하려면 사인들의 유대관계 속에서 이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Ⅱ. 知貢擧와 進士科 及第子의 關係
먼저 座主와 門生이라는 명칭에 관해 알아보자. 과거의 합격자들은 자신을 뽑아준 시험관을 座主로 또 스스로를 문생이라 일컬으며 서로간에 공고한 유대를 가졌는데 이 명칭의 기원을 알아보려면, 수․당대의 과거제도의 성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원래 문생이란 말은 직접 배우지는 않았더라도 스승의 학업을 전수하는 이를 뜻했는데, 수대에는 문생이 태학의 학생을 일컫기도 했으며, 당전반기에 이르러서도 그러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동양사] 당전기의 지배층
  • 확립에서 구분하고 있으나, 엄격한 사서의 구별에 기초를 둔 귀족제적 율령관제가 실질적으로 붕괴되고, 광범위한 관료층의 기반이 형성되어 황제의 전제독재가 강화되는 관료제의 기반은 당초이래의 여러 정책과 현상에서 구할 수 있다. 참고문헌▷유원적, 〈당 전기의 지배층〉,《강좌 중국사Ⅱ》, 1989, 지식산업사▷김명희, 《중국 수당사 연구》, 1998, 한국자료원▷中村圭爾,〈6조 귀족론〉,《일본의 중국사논쟁 -1945년 이후》, 1996, 신서원

  • 태평천국운동의 정책 및 제도 연구
  • 중국사』 (경기도 파주: 서해문집, 2004.) .Ⅲ. 결론태평천국운동은 자체의 미성숙과 국내외적인 상황 아래에서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이후의 역사 진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후 중국 근대사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 민국혁명으로 이어지는 개혁과정은 태평천국의 역사적 경험을 계승하고 그 영향을 받음으로써 전개되었다. 19세기 중엽 서구 열강의 침입과 국내의 개혁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짊어지고 민중

  • 역사와 민족주의에 대한 고찰
  • 사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국적있는 교육’으로 압축되어 추진된다. 「중학교 국사」에서 그대로 가시화 되었는데 역사적 사실 각각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후 1979년 교과서부터 나타난 특징은 한일병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기보다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국권을 강탈했다는 식으로만 언급. 또한 조선총독부의 지배정책에 대한 서술 분량이 해를 거듭할수록 줄고 대신 항일투쟁에 관한 서술 분량이 늘어났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한국인의 주체

  • 남북한의 역사 관비 교남 북한의 발해사 인식
  • 간의 공백이 있다가, 1986년부터 다시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발해사에 대한 변화는 이미 1970년대말 사회역사원리로써의 주체사상이 역사학에 반영되면서 일어났다. 특히, 역사적 정통성과 관련하여 발해는 신라보다 우위에 있기 시작하였다. 1979년에 발간된 조선전사는 남쪽의 일반론인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후기신라로 정리되었고, 그 순서에 있어서도 발해와 후기신라라 하여 발해를 앞세웠는가 하면, 발해의 건국을 창건이라 하여 그 비중을 높

  • 사마광의 자치통감
  • 따라서 사마광은 중국사학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위대한 역사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고국항, 《중국사학사 下》, 풀빛, 1998.민두기, 《중국의 역사인식 上》, 창작과 비평사, 1985.박종혁, 《자치통감 경세요결 100선》, 아세아문화사, 1998.신태갑, 《중국사학사 강의》, 신서원, 2000.이계명, 〈『자치통감』연구〉, 《전남사학》, 1996.이윤화, 〈왕부지의 『독통감론』권말「서론」〉, 《중국사연구》탁용국, 《중국사학사대요》, 탐구당, 1986.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